송고 후엔 초조함, 채택 후엔 환희... 글쓰기의 마력
은퇴후 찾아온 공허함
33년 넘게 분신처럼 따라다니던 직함들이 하룻밤 새 뜯겨 나갔다. 화려한 수식어가 증발해버린 아침, 거울 속에는 낯설고 초라한 사내 한 명이 멍하니 서 있었다. 은퇴만 하면 산과 바다를 누비는 자유로운 유랑자가 될 줄 알았건만, 막상 마주한 현실은 낭만이 아닌 막막한 정적뿐이었다.
가슴 설레며 적었던 '버킷 리스트'는 갈 곳 잃은 낙서가 되었고, 꿈꾸던 자유는 발밑을 서성이는 휴지 조각 같았다. 평생 나를 지탱하던 사회적 자아가 사라진 자리, 그 깊은 공허의 틈새로 은퇴의 차가운 민낯이 비집고 들어왔다.
사회적 역할을 하면서도 채워지지 않은 갈증
퇴직 후의 일상은 겉보기에 역동적이었다. 브런치 작가로 글을 짓고, 인생나눔교실 멘토와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으로 현장을 누볐다. 나의 경험과 강점이 쓰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위안이었다. 텅 빈 일정을 빼곡하게 채워 넣으며, 나는 여전히 사회에서 '유효한 존재'임을 필사적으로 증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사회적 역할이라는 옷을 부지런히 갈아입어도 그것이 온전한 '나 자신'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 안의 깊은 목소리는 여전히 부유하고 있었고, 일상의 '바쁨'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갈증이 나를 괴롭혔다. 그것은 단순히 외적인 성취만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무엇이었다.
오마이뉴스와 운명적인 만남
잠 못 이루고 뒤적이던 컴퓨터 화면 위로 낯선 문구 하나가 날아와 꽂혔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 대한민국 대표 시민참여 언론인 오마이뉴스의 슬로건이었다. '전문 기자도 아닌 내가 감히 기사를 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앞섰지만,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진 무언가를 뱉어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평소 브런치에서 꾸준히 글을 쓰며 영감을 주시던 유영숙 기자님의 발자취도 용기가 되었다. 그날 밤의 만남은 어쩌면 예견된 '신의 한 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은퇴 후 처음으로, 누구의 무엇도 아닌 '나의 사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생존 확인서가 되어 돌아온 나의 첫 기사
2024년 7월 2일, 첫 기사 <은퇴 이후는 인생 황금기, 새로운 것에 도전합니다>(https://omn.kr/299qi)를 세상에 내놓은 것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선 나의 새로운 출발선이었다. 하지만 기사를 쓰는 과정은 매 순간 자신과의 치열한 사투였다. 문장 하나에 밤을 지새우고 단어 하나에 수십 번 백스페이스를 누르며 벼려낸 글을 '송고'하고 나면, 그때부터 피를 말리는 기다림이 시작된다. 스마트폰을 곁에 두고 내 진심이 에디터에게 닿았을지 노심초사하며 화면을 켜는 시간은 날 선 떨림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기사가 채택되었습니다'라는 알람이 울리는 순간, 심장을 짓누르던 긴장은 형언할 수 없는 환희로 바뀐다. 지금까지 30여 건의 기사가 채택되며 마주한 조회 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세상이 보내준 '생존 확인서'였다.
특히 작년 동짓날, 팥죽 이야기가 메인 화면을 장식했을 때 가족들과 하이 파이브를 하며 아이처럼 웃던 전율은 잊을 수 없다. 내 글이 활자가 되어 세상이라는 파도를 타고 타인의 마음에 가닿는 이 짜릿한 연결의 감각이야말로, 명함 없는 책상 앞에 앉은 나를 다시 살게 하는 글쓰기의 진정한 마력이다.
▲메인 기사에 배치된 <동지 팥죽 위 비단 덮개, 그 부드라운 맛을 아시나요> ⓒ 이점록
사라진 명함 대신 얻은 '나'라는 이름표
글쓰기를 시작하며 나의 일상은 180도 바뀌었다.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동네 시장의 풍경과 아내와의 소소한 산책길 대화는 이제 모두 소중한 기삿거리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무슨 이야기를 글로 옮겨볼까' 고민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장바구니 물가에 한숨 짓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시대의 아픔을 읽어내는 예리한 시선도 갖게 되었다.
최근에는 책을 읽고 타인의 지혜를 내 삶의 문장으로 재해석하여 세상과 공유하는 서평쓰기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서평은 단순한 독후감을 넘어, 저자의 사유에 나의 통찰을 더해 세상과 연대하는 지적인 대화의 장이 되어준다. 이처럼 글쓰기는 은퇴라는 담벼락에 갇혀 있던 나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 타인과 다시 연결해주었으며, 무엇보다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제 나에게는 옛 명함 대신 '시민기자'라는 당당한 이름표가 생겼다. 100세 시대를 준비하는 최고의 대책은 끊임없는 도전임을 깨달았다. 오늘도 인생의 가장 뜨거운 황금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은퇴라는 낯선 계절을 통과하고 있는 수많은 이 시대의 퇴직 가장들에게 전하고 싶다.
당신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 작은 움직임이 당신을 건져줄 튼튼한 밧줄이 되어줄 것이라고. 사라진 명함 대신 '나'라는 이름으로 채워갈 다음 페이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찬란하다.
#오마이뉴스 #은퇴 #생존확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