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평소처럼 하루의 첫 루틴으로 이불을 개는 작은 습관을 실천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 '장님들의 만찬' 약속이 퍼뜩 생각이 났다. 몇 번의 약속을 미루다가 해를 넘겨 드디어 저녁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만큼 보고 싶은 분들과의 만남이라 더욱 반가운 게 당연하다. 장소는 시내에서 벗어나 외곽지에 위치한 식신 대한민국에서도 인정하는 맛집으로 많이 알려진 오리돌구이 전문 M농원이었다.
오늘은 여러 귀한 분들이 모였다. 이장, 소장, 면장, 청장, 회장 등 장님들이다. 모두 따스한 정으로 뭉쳐진 참으로 좋은 사람들과의 저녁시간이다. 서로에 대한 건강 그리고 건승을 기원하며 건배를 이어나갔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좌중은 이를테면 막 이야기 하기 한껏 좋은 분위기가 되었고 면장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지나간 시절을 반추하기도 하며 서로에 대한 감사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건강 악화로 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이장에게 집안 사정으로 술을 끊은 지 강산이 세 번은 바뀌었을 만큼 긴 세월 동안 금주를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듯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께서는 주식이 술, 부식은 밥이었습니다." 이장은 충분히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아 준다. "농사일을 하자면 하루에 다섯 끼는 먹어야 하는데 새참 또는 식사 반주로도 술을 많이 드셨을 거예요." 나는 다시 말을 이어간다. "안주도 변변찮은 술에 의지해서 일을 하시더니 결국 좋은 세상을 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시더군요."
이장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응대를 한다. "아휴 그렇게 되셨군요."
"저는 아버지를 땅에 묻으면서 다짐을 했지요. 술을 먹지 않겠다고요" 나의 금주의 변은 이렇게 끝이 났다.
사실 초임시절부터 술자리는 많았지만 퇴직을 할 때까지 긴 세월 동안 금주를 이어가는 아주 독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개인의 신념과 신앙심의 발로였지만 정답이라고 생각한 적도 말한 적도 없다. 더군다나 조직에 해를 끼친 적은 없다고 항변하고 싶지도 않다. 다르지만 결코 틀리지 않았으니까.
❙ 나눔 ❙
팔순이 되신 선배 회장님이 천천히 말씀하실 때는 일동이 귀를 쫑긋해서 들었다. 주변 다른 손님들의 큰 목소리도 있었지만 워낙 목소리가 낮고 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숱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 공직을 거친 청장은 "역경과 어려움이 혹시라도 찾아오면 좌절하지 말고, 그럴 때마다 면역이 생기고 견디고 이겨내면 더 강한 힘이 생기는 '좌절면역력'이 생긴다."라며 후일담으로 진지한 인생 나눔을 실천하는 듯 보였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서로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시간이 깊어갈수록 만찬의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듣고만 있던 면장이 화제를 돌렸다.
"요즈음 속칭 MZ세대들은 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듯합니다. 코로나19 탓인지 모르지만 회식도 줄고 술을 잘 먹어야 미덕인 시절은 많이 퇴색해진 느낌입니다." 물론 술은 사람을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 증진의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보니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개인의 행복을 더 추구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렵게 자란 기성세대에 비해 가격 대비 성능을 따지는 가성비보다는 만족도를 따지는 가심비를 더 추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가격이라도 명품을 선호하는 이른바 과시형 소비도 한 몫하고 있다. 확연히 세대차이를 느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해와 공감은 절대 필요하다. 그렇다 여행지에 빨리 가는 방법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다.
❙ 기쁨 ❙
감사하게도 회장님께서는 손수 인진쑥을 정성껏 달여서 가지고 오셨다. 인진쑥은 간, 혈액, 피부미용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겨울에도 죽지 않는 특이성으로 어떠한 환경에도 잘 자라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기도 한다. 아내와 딸 우리 가족 모두 먹으며 건강을 다져야겠다.
선물은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 모두에게 감사와 기쁨을 주니 서로에게 좋은 것이다.
가장 즐겁고 행복한 금요일 밤의 만찬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음에 아쉬움을 표했다. 악수가 부족하여 포옹을 하기도 했으니...
아직 꽃샘추위가 버티는 듯 하지만 남쪽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에 자리를 양보할 날이 가까워옴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