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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점록 Feb 21. 2024

희로애락 속에서 피는 꽃    

기쁨과 슬픔의 여행  

  

  1년 삼백예순다섯날은 누구에게나 기다림없이 쉼없이 공평하게 주어진다. 살다 보니 어느덧 예순이 넘었다. 때로는 강한 비바람으로 때로는 부드러운 햇살 가득한 삶이었다. 또 한해를 만나서 기쁘다. 누구나 새해를 맞이하며 한해살이를 계획한다. 그러고 보니 희로애락의 조각보들이 행복을 만들어 간다. 


  인생은 희로애락이다. 즉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라는 네 가지 주요한 감정을 표현한다. 인생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인간의 일상과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 여러 문학 작품이나 예술 형태에서도 이 감정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음이다.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겪게 되는 복합적인 감정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우리는 행복을 꿈꾸며 살아간다. 사람의 감정은 복잡하다. 같은 상황에서도 다양한 반응과 감정을 보일 수 있다. 

  

 기쁨은 우리를 자극하고 영감을 주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게 도와준다. 그러나, 삶은 단순히 기쁨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슬픔의 순간들도 우리의 여정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실패, 상실, 어려움, 험난한 시기는 우리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상황이다. 이러한 어려운 순간들은 우리에게 도전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의 강인함을 시험한다. 슬픔은 때로는 우리에게 더 나은 방향을 찾게 하고, 감사와 인내를 가르쳐준다.


  일상에서 좋은 일이 발생했을 때 '기쁨', 어떤 것에 대해 화가 났을 때 '분노',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슬픔', 좋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때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끼며, 그 감정을 극복하고, 이해하며, 나누는 과정 속에서 인간적인 깊이와 성장을 경험한다. 사람들 간의 관계와 소통에서의 감정 변화와 대처 방식은 매우 유용하다.




  본디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그 시절 농촌의 사정은 거의 비슷하리라. 방학이 되면 여행이나 친척 방문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들로 산으로 집안 일손을 도와야 했다. 여름이면 밭에 가서 김을 매고 소꼴을 베고, 소먹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겨울이면 동네 형들과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산으로 향했다. 


  사실 읍내에 위치한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자취할 형편이 못되어 동네 형 자취방에 더부살이를 했다. 그럼에도 비교적 밝은 성격이었다.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면 노래와 춤으로 주름잡았다. 그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그렇게 질풍노도의 3년을 꿈도 제대로 꾸지 못한 채 졸업을 했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대학 진학의 꿈은 차라리 사치였다.


    나의 20대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고 청춘이니까 아프다'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동안 부모님 일손을 도와드렸다. 그리고 지원 입대를 했다. 아버지는 술힘으로 농사를 지으셨다. 끼니는 드시지 않으셔도 술은 항상 드셨다. 술은 주식이요 진지는 부식이었다.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드셨을까 싶다. 군대에 있을 때 결국 아버지께서는 건강 악화로 돌아가셨다. 나는 천붕지통 속에서 다짐했다. 술을 먹지 않겠다고...  


  무사히 복무를 마친 후 1년 정도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그리고 무작정 도회지로 나갔다. 처음에는 자동차 부품 공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공시생이 되어 독서실을 전전하였다. 낮에는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졸린 눈 비벼 가며 책과의 사투를 했다. 몇 차례 낙방 끝에 경찰공무원 시험에 힘들게 합격하였다. 그리하여 낯선 서울 서대문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좌우명은 '정직과 성실을 영원한 벗으로'였다. 결혼 후 좌우명은 아이들의 훈육을 위한 가훈이 되었다. 


  30~40대는 슬픔과 행복이 공존하는 도약의 시기였다. 홀로 지내시던 어머니께서 한많은 세월을 사시다가 눈물로 돌아가셨다. 그토록 당신의 며느리를 보고싶어 하셨는데... 그래서 나는 불효자였다. 그즈음 사무실에서는 나를 장가보내기 위해 추진단(?)까지 꾸려졌다. 진정한 동료애 덕분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업무능력을 인정 받아 승진도 했다. 


  결혼 이듬해 생애 첫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하늘의 선물인 맏딸까지 낳았다. 겹경사가 이어졌다. 마치 행복의 참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맞벌이 부부로서 육아 문제, 가사 분담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1인 다역도 손발이 척척 맞았다. 

  참으로 바쁘게 살았다. 그 와중에 늦둥이 막내 아들이 태어나 기쁨은 배가 되었다.  


  50대는 경력의 정점에서 중간관리자로서 성과 창출에 기여하였다. 상사와 부하 직원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퇴직을 앞뒀지만 일하는 즐거움이 충만했다. 

  33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명예롭게 정년퇴직을 했다.

 



  퇴직 후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했다. 

  브런치 작가, 인생나눔교실 멘토, 학교 운영위원회 위원, 안전 지도관 등으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행복한 인생 2막의 나날이었다.

 

  얹그제 2024년 주민자치위원회 신규 위원으로 위촉을 받았다. 지역사회의 의견 수렴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문화 창출과 복지에 기여하는 촉매제가 되고 싶다. 

   "소통과 공감으로 공동체의 꿈을 실현하자."는 일념이다. 

  주민의 생생한 목소리를 경청하자. '현문현답' 즉, 현장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인생은 희극과 비극의 연속이다. 때로는 웃음 속에 기쁨을 찾고, 때로는 눈물 속에 슬픔을 경험한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삶의 일부이며, 우리의 여정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웃음과 놀라움은 행복한 순간들을 채우고, 어둠과 아픔은 우리를 시련에 놓아둔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이 모든 감정과 경험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실 우리 인생이 늘 순탄할 수만은 없는 게 사실이다. 뜻대로 안 되는 현실에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 수가 있다.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에 하늘을 향해 원망한다. 그나마 평온하게 살아 온 것에 감사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다. 기쁜 일이 있다면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안 좋은 상황을 대비해야 하자. 슬픈 일이 있을 땐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기에 툴툴 털고 일어서자. 

 

  인생은 희로애락 속에서 피는 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공감에세이 #희로애락 #정년퇴직 #주민자치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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