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벚꽃의 꽃말이 시험기간이 아님은 - 이모

[이모저모세모] 2022년 04월호

by 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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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벚꽃의 꽃말이 시험기간이 아님은



[이모] 나의 시험 기간


벚꽃을 마음껏 보지 못했던 대신 그 시기라도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건만, 내 시험 기간의 기억은 흘러간 시간에 송두리째 빼앗겼다. 대학 생활 중 가장 기억이 나지 않는 시간이 바로 시험 기간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의지할 것은 기록뿐이었다. 다음은 다이어리와 메모장, 메신저 앱에서 발췌한 년도 별 나의 시험 기간 모습이다. 주제에 맞게 중간고사만 추려봤다.



[2016년 4월 19일부터 시작된 메신저 앱에서 한 대화]

안 돼. 그러지 마. 너라도 공부해야지.

나는 오늘 밤새야 할 것 같아.

같이 새자 중간고사는 경험이지.


[2017년 4월 23일부터 메신저 앱에서 한 대화]

밤을 샐 생각을 하면 시간이 길어진 느낌이야.

왜 나 맘이 편하냐. 포기한 건가. 정신 차려. 이모 뇌야. 편해지지 말라구

내가 공부를 해야 해? 저걸 봐야지??


[2018년 4월 23일 다이어리 발췌]

시험이 끝나면 수업 나가는 건 그날그날 공부하자.

시험 기간에는 공부하기 싫어지니까 흑흑….


[2020년 5월 1일 메모장 발췌]

시험 OK 조졌으….



불쌍한 대학 시절 시험 기간의 이모…. 이걸 본 누군가도 무얼 하든 밤샘으로 시간이 길어졌다는 착각은 하지 말길 바란다. 경험상 밤을 새워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빠르게 끝내고 조금이나마 자는 게 낫다. 아니면 이틀 후에 더 힘들어진다. 그리고 밤새야 한다는 말은 쉽게 꺼내지 말길…. 나는 그 말을 하고, 많은 경우 잤다. 또한 수업에서 배운 걸 당일에 공부하자는 다짐은 시험 기간에 해봤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다짐은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2020년은 그나마 코로나 때문에 혼란스러운 시기라서 오픈북 시험도 많았고 수업 개수도 많지 않아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런 불쌍한 시간이 지난 나는 이제 원하는 만큼 꽃놀이를 즐겨도 된다. (물론 코로나 조심!) 이젠 그래도 되는 시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자유를 얻은 만큼 이제 모든 걸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어려움이 생겼다. 나는 이제 나의 할 일을 직접 만들어가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어딘가


언젠가 선배가 소속감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듣던 나는 대학생이었고, 과제에 치이고 있었기에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작년, 학생의 신분만 겨우 연장하고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툭 던져졌을 때 비로소 이해했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이렇게 애매하다는 것을.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할 일을 직접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누군가 시킨 것이었고 난 주어진 것만 하면 됐다. 그렇게 해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학을 마친 뒤엔 주어지는 게 없었다. 내가 나에게 할 것을 만들어주고 행해야 했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없음에 막막함을 느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제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제약이 없으니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 하면 됐다. 나는 정해진 무언가를 싫어했다.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나에게 몇 가지 루틴을 만들어줬다. 정해진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맞게 만들어줬다. 나를 더 잘 알게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에게 최적화된 루틴과 행동 습관들 덕에 난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지 않고 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한다. 내가 게을러지면 그런 내 행동에 맞게 시간을 조금씩 늘려주면 됐다.


그리고 난 이제 나를 달래면서 적당히 거래하는 법도 안다. ‘이것까지 하고 영상 보기’, ‘뽀모도로 한 번 안에 끝내기’, ‘오늘의 할 일 80% 이수 시 원하는 것 하나 보기’ 등등. 내가 감정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주는 방법을 이제라도 알게 됐다.


2021년에 난 계속 무언가를 했다. 아주 운이 좋게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서 많은 걸 할 수 있었다.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책을 읽고 의견을 공유했으며 라디오를 다시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 땐 강의를 듣고 언어 공부를 하고 무언갈 보고 글을 썼다. 내가 해야 하는 게 아닌 하고 싶은 걸 선택해서 해냈다. 처음으로 내가 주체적으로 해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하고 싶은 게 하기 싫어질 때도 있었고, 갑자기 커다란 불안과 초조함이 닥칠 때도 있었다. 할 것을 만든 이후에는 이것들을 관리하는 게 과제였다. 이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미워할 구실을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자기 비하는 아무 자원 없이 혼자 쑥쑥 자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변하는 나를 가장 처음 보고, 누구보다 익숙해지고, 그래서 결국 좋아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의 과정을 다 알기에 내가 선택한 길을 이해할 사람도 나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나는 나를 믿고 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니까 예전보다 훨씬 내가 좋아졌다. 좋아하는 걸 선택해서 해나가는 내가 정말 좋았다. 하나씩 좋아하는 걸로 채워가는 내가, 그래서 나를 이전보다 더 잘 알게 된 내가 좋았다.


이 시기를 겪으며 알게 된 건 할 일이 있는 게 좋다는 것이다. 새로운 할 일이 생기면 기분이 좋다. 어쩌다 해야만 하는 할 일이 생기면 ‘오히려 좋아!’를 외치고 시작했다. 할 일들을 해치운 뒤 생기는 ‘해냈다!’라는 성취감이 정말 좋았다. 꽉 찼던 투두리스트가 점점 체크될 땐 내 안에 채워지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할 일이 있다는 건 내가 기능한다는 증거 같았다. 그래서 난 할 일이 있는 게 좋았다.


이런 삶이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내가 선택했기에 더욱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선택의 기준은 나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이젠 내가 또 무얼 배우고 알아가게 될지 기대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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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게시글은 2022년에 쓰인 글로,

네이버 블로그에 포스팅한 게시글을 브런치에 재업로드 한 것입니다.


2023년은 홀수 해를 맞이해 홀수달에 발행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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