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저모세모] 2022년 08월호
‘띠띠띠띠-‘ 알람 소리에 용수철 튕기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마지막 짐 정리를 했다. 2019년 12월 31일, 노르웨이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요 며칠은 교환학생 생활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었던 것을 물론이고, 여행에 대한 걱정과 긴장으로 잠도 못 자고 위통까지 왔다.
여행카페에서 조금만 찾아보면 소매치기와 각종 사건사고 썰이 난무하는 유럽. 그곳에 나 혼자 가게 되었다. 그것도 비행기표와 3일 치 숙소만 구한 채! (총 17일 여행) 지금까지 이런 여행은 없었다.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여행은.
자고로 한국인이란 여행 가기 전부터 철저한 사전 조사를 통해 몇 박 며칠 치 코스를 짜놓는 법!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알차고 빡세게 관광을 하며 모든 랜드마크를 찍는다. 여기까지 왔는데 뽕 뽑아야지~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이런 여행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실상은 항상 숙소와 이동 수단, 예약해야 하는 관광지만 예매하고 떠났지만… 한 번도 그런 적 없지만 언제나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 불안한 마음을 안고 여행길에 올랐다. 이렇게 설렘보다 불안함이 더 큰 여행은 처음이야!
“씽코! 꽈뜨로! 뜨레스!…” 새해 카운트다운에 맞춰 컵에 담긴 포도알을 허겁지겁 입에 집어넣었다. 스페인에서는 다음 한 해(12달)의 행운을 기원하며 12초 카운트다운에 맞춰 12개의 포도알을 1초에 한 개씩 먹는다나. 포도알을 1초에 1개씩 먹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해피 뉴 이어!!” 2019년의 마지막과 2020년의 처음을 낯선 이곳,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보냈다. 낭만적이라면 낭만적인 마무리와 시작이었다.
어느새 꽉 조였던 긴장이 풀리고, 새해의 분위기에 들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처음 말을 붙인 상대는 브라질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 라파엘이라는 친구였다. “저 밖에 뭐 있어? 왜 자꾸 사람들이 저기로 나가는 거야?”라는 시답지 않은 말을 시작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는 여행자답게 여행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의 여행방식은 놀라웠다. 라파엘은 여행지에서 무엇을 할지 하나도 조사하지 않고 여행지에 도착해 그날그날 정한다고 했다. 호스텔의 무료 투어 프로그램에 맞춰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호스텔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즉흥적으로 함께 하기도 한다고 했다. 숙소 또한 미리 예약하지 않고 적당한 호스텔을 직접 방문해 현장에서 결제한다고 했다. 심지어 나라도 정하지 않고 떠난다고! 그러면서 그는 스페인 다음에 어디로 갈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여행에 대한 나의 생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앞서 말했듯 나에게 여행이란 미리 계획을 세우고 그곳에서 봐야 하는 것들을(미술관, 박물관, 관광지 등) 보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에 앞서 항상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고, 계획을 세우지 못하거나 여행지에서 가야 할 곳을 못 가면 죄책감이나 찝찝함을 느끼곤 했는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여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여행지에서마저 알차고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과연 한국인다운 생각이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계획된 게 하나도 없었다. 라파엘의 말에 놀라워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나도 그와 별 다를 게 없었다. 발길 닿는 대로 시내를 돌아다니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기도 하고, 하루 전날 어디를 갈지 정하고, 사람들을 따라 일정을 변경하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미국인 친구와는 재즈바를 갔고, 중국인 친구와는 살사댄스 원데이 클래스를 들었다).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놀라운 방식대로 여행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자유롭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알차고 효율적인 여행’이라는 틀에서 조금 벗어났다. 많은 것들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못 가고 못하면 아쉽긴 하지만, 이번에 못 한 것들은 다음을 위해 남겨두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여행에 대한 가치와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였다.
한걸음, 한걸음이 아쉽기만 했다. 호스텔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헤어짐도 가까워졌다. 그 마음을 하늘이 눈치라도 챈 듯, 에릭의 핸드폰 배터리가 1%밖에 남지 않았다. 내 보조 배터리를 빌려주는 동안 우리는 아주 잠깐 더 함께 있을 수 있었다. 핸드폰이 충전되길 기다리며 서로를 알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여행지에서 이렇게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단 며칠의 만남에도 짙은 아쉬움이 남는 인연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브라질 친구 라파엘, 대만 친구 에리얼, 이집트 친구 나르민, 미국인 친구 페이지와 에릭, 그의 형 크레이그, 중국인 친구 율리 등. 짧은 만남도 있었고 소중한 인연도 있었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당연한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나르민 언니는 당당했다. 우리는 마드리드에서 함께했는데, 기다릴 다른 일행이 신경 쓰여 기념품 가게에 들르자는 말을 안 한 나와 달리 언니는 당당하게 ‘나 여기 가고 싶어, 여기 들렀다 가자’라고 말하고는 시간을 신경 쓰지 않고 구경했다. 언니는 사진도 곧잘 찍어달라고 요구했는데, 원하는 대로 사진이 나올 때까지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배려심이 부족해 보이면서도 당당해 보였다. 언니를 보며 나도 좀 더 당당하게 무언가를 요구할 것을 배웠다.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독일인 호스텔 직원은 ‘Workaway’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호스텔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대신 무상으로 일하는 중이라고 했다. 타지에 머물기 위해서는 유학이나 여행 등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다른 나라에 머무는 방식이 있구나 깨달았다.
에릭의 형 크레이그는 나와 다른 관점에서 미술작품을 감상했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에서 그는 작품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견해를 말하곤 했는데, 주로 그림의 의미와 상징, 의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의 감상과는 사뭇 다른 내용에 나는 무엇을 위주로 그림을 보는지 생각해보았다. 주로 그림의 형태, 붓 터치와 연필 선의 느낌, 그림을 보며 느껴지는 감정, 작품이 주는 느낌 등을 봤다. 미술관과 친숙한 나였지만 감상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다양한 인연 덕에 다채로운 여행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 세계관, 문화가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들 덕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것들을 경험했다. 내 세상만이 전부가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는 여행이었다. 짧았지만 참 소중하고 고마운 인연들이었다. 받은 것도 많고 애정하는 마음도 있어 짧은 만남이 아쉽기만 하다.
이국적인 야자수길 너머로 푸른색의 잔잔한 움직임이 펼쳐졌다. 푹푹 밟히는 모래사장을 지나 푸른색에 가까이 다가가 본다. 그러고는 적당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만히 그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이번 여행에서만 4번째 방문인 바르셀로네타 해변이다. 드디어 이곳에 혼자 오게 되었다. 첫 번째 방문은 미국인 친구 에릭과 함께, 두 번째는 인도계 영국인 친구와 함께, 세 번째는 중국인 친구 율리와 함께였다. 함께여서 즐거운 때도 있었고 함께여서 피곤한 때도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도 좋지만 마지막만큼은 나 혼자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다.
여행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 여행을 돌아보며,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혼자 여행을 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혼자'. 누군가는 외로움을 느끼고 누군가는 쓸쓸함을 느끼지만 나는 혼자 하는 모든 것을 좋아한다. 함께일 때보다 심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혼자가 주는 자유로움과 편안함, 유연함을 사랑한다. 이번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내가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렀다. 누군가를 신경 쓸 필요도, 의견을 조율할 필요도 없었다.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다 사람이 그리워지면 호스텔에서 친구를 사귀었다. 혼자 하는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혼자 있고 싶을 때 혼자일 수 있고, 함께이고 싶을 때 누군가를 새롭게 만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친구를 사귀는 것 또한 혼자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친구와 하는 여행과는 색다른 매력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은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 나는 생각보다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새로운 사람 만나길 좋아했으며,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느긋한 여행을 좋아했다. 혼자 하는 여행의 매력에 푹 빠졌지만, 사실 다시 혼자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선다. 스페인으로 떠날 때처럼 잔뜩 긴장할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서 벗어나 나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혼자’와 ‘낯선 공간’의 조합은 특별하다. 두렵지만 두근거리고, 심심하지만 설레는 혼자 할 다음 여행이 기다려진다.
불이 꺼진 비행기 안에서 이번 여행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스페인 여행은 마치 교환학생의 축소판 같았다. 나 홀로 모든 것을 해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나의 세계관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좋은 의미로). 관광이 아닌 여행다운 여행이었다.
그래서일까 스페인 여행에 대해 할 말이 가장 많았다. 가장 최근에 한 해외여행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가장 특별한 여행이었다. 이 글을 통해 여행을 정리하고 뒤돌아보고 싶었다. 이국적인 스페인의 풍경도, 환상적인 가우디의 건물도, 그곳에서 만난 인연도, 당시의 나도, 다시 꺼내 보니 반갑고 행복했다.
해당 게시글은 2022년에 쓰인 글로,
네이버 블로그에 포스팅한 게시글을 브런치에 재업로드 한 것입니다.
2023년은 홀수 해를 맞이해 홀수달에 발행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