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저모세모] 2022년 08월호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한주연이고요. 26살이고 여행을 매우 좋아해서 언제든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여행이라면 퇴사도 불사를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 멋있네요.
두 곳이 생각나는데요.
첫 번째는 지리산의 달궁 오토 캠핑장이에요. 어렸을 때 가족과 거의 매주 캠핑했었는데요. 이 캠핑장은 특이하게도 설명하시는 분이 저녁에 아이들을 앉혀놓고 캠핑장이나 주변 환경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주셨어요. 거기가 지리산이다 보니 그분이 농담으로 ‘여러분이 텐트에서 자고 있을 때 반달곰이 올 수도 있어요’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만약 반달곰이 우리 텐트에 오면 먹을 걸 던져줘야 하나? 차로 도망가야 하나?’라는 상상을 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마침 그때 비도 왔고요. 단편적이고 두려운 기억이었지만 자연 속의 온전한 제가 뇌리에 박혀있어서 아주 어릴 때 갔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에게 매번 얘기를 꺼낼 정도로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2014년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간 유럽 여행의 영국이에요. 영국에 특별한 게 있진 않았는데 정말 많이 걸어 다녔어요. 하루에 5시간은 걸었고, 동생이 코피가 터졌는데도 저희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직진하셨어요. 덕분에 저는 다음 영국 여행에서 친구들을 인도할 수 있을 만큼 길을 다 외워서 아빠한테 감사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땐 어려서 아빠가 좀 원망스러웠어요. ‘동행자의 템포에 맞출 필요도 있는데 왜 저렇게까지 여행할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억에 남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정적일 수 있는 기억들인데 그것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게 신기하네요.
맞아요. 부정적인 기억까진 아니지만, 오히려 힘들었던 경험들이 기억에 많이 남고,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되어 아름답게 포장되는 것 같아요.
두 번 고민할 필요도 없이 프랑스 파리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곳에서 보낸 열흘은 모든 게 막연하게 좋았어요. ‘완벽하다’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말 좋았던 여행지인데, 마침 딱 가을이 와서 날씨도 좋았어요. 유럽 특유의 건물과 자연이 어우러졌을 때의 광경도 매우 완벽했고요. 무엇보다 함께 있던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이 좋았어요. 처음에는 알맹이 없는 대화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서로 대화하면서 풍부해져서 알맹이가 채워지고 다채로워지고, 결국 저희를 성장시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가고 싶고 같이 못 갔던 저모님과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네요.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가는 길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날은 친구들이랑 합의 하에 각자 여행을 한 날이었어요. 여러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지만 일단은 가보자는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어요. 마침 날이 매우 좋았고, 숙소도 마레 지구라는 화려하고 구경할 게 많은 동네에 있어서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는 길에 다양한 가게들도 구경하며 걸었어요. 그렇게 콧노래 부르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센느강을 마주했는데요. 그때 그 구름 한 점 없는 풍경과 센느강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면서 마음의 평화가 생겼어요. 무엇보다 제가 이 공간에서 여행자가 아닌 이곳에 소속된 파리지앵인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굉장히 좋았어요. 좋은 기분을 가지고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서 모네의 작품들을 보니까 더 크게 와닿았고, 파리가 저에게 준 감동적인 인상들이 있어서 그 장소가 기억에 남아요.
2019년 9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광장을 지나가다 친구가 갑자기 사준 아이스크림이요. 그 아이스크림 맛이 특별하거나 꼭 스페인에서만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기억에 남은 이유는 그때 제가 돈이 별로 없었거든요. 아마 친구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텐데 선뜻 아이스크림을 사준 게 감동적이어서 더 맛있게 느껴졌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그 친구와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확신을 그 아이스크림을 통해 느꼈습니다.
친구와의 우정 덕분에 더 특별해진 아이스크림이네요.
맞아요. 이 글을 보고 있을 너. 많이 사랑한다. (웃음)
부끄럽지만 네덜란드에서 만난 호텔 프론트 보이가 제 여행 역사 중 가장 기억에 남아요. 완벽히 제 이상형이었거든요.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는 게 뭔지 알려준 첫 번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를 매료시켰어요.
정말 매력적인 분이셨나 봐요. 다시 만난다면 말을 걸어보고 싶으신가요?
그렇진 않아요. 저는 2019년 8월에 그분의 그 순간을 좋아했지만, 그분 자체를 좋아한 건 아니거든요. 저에게 그냥 그 순간 호텔 프론트 보이로 뭔가를 하고 계셨던 그 모습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사진이요. 저는 매일 앨범에 들어가서 최근에 찍은 사진부터 예전에 찍은 사진들까지 봐요. 그러다 보면 매일 다른 느낌이 들어요. 사진을 계속 보면서 여행을 상기시키고, 살아갈 동력을 얻어요.
매일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든다고 하셨는데요. 그때 그 순간을 느끼고 싶은데 매일 느낌이 변한다면 처음의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쉽진 않나요?
사실 기억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고, 몇 순간을 빼면 정확히 그 여행에서 느꼈던 일거수일투족이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기억이 변하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J형이지만 게으른 J형이에요. 그래서 처음에는 열심히 계획을 세우려고 노력하고 친구들이 계획을 안 세우면 세우도록 유도하는데요. 그걸 지키지 않는다고 제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지 않기 때문에 계획은 허울에 불과합니다. 여행을 가기 전에 불안함을 덜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아주시면 좋겠어요.
저는 기본적인 예의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만 지켜도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예의만 서로 잘 지킨다면 무리 없을 것 같아요.
사람마다 기본적인 예의의 기준이 다를 수 있잖아요.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면 예시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저의 경우는 그냥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거예요. 그게 쉽지는 않죠. 왜냐하면 서로 눈치 보면서 맞춰주는 것도 있으니까요. 근데 컨디션이 안 좋으면 안 좋다고 말을 해주면 좋겠어요.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면 거기서 조정할 수 있으니까요. 괜히 말 안 하고 혼자 숨기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기분 나빠 보이면 그때부터 서로 묘하게 눈치 보면서 감정 소모를 하게 되잖아요. 그럼 찜찜하고 더 불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솔직해지는 게 기본적인 예의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이 기회로 주연님의 예의를 알게 돼서 너무 좋아요. 왜냐하면 저는 오히려 힘들고 짜증 나는 감정을 내비치는 게 실례인 것 같아서 그 감정을 숨기려고 노력했는데, 이걸 몰랐다면 서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었잖아요. 주연님께는 솔직하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동행자의 건강 상태요. 저는 각자의 건강 상태에 굉장히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에요. 생리를 한다든가 머리가 아프다든가 소화가 안 되는 걸 포함해서, 걸으면서 지쳐가거나 배가 고파지는 것들에 예민하게 반응해요. 이런 걸 체킹해야 동행자잖아요. 서로서로 책임지고 기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유도리 있게 스케줄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동행자의 건강 상태가 중요해요.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됩니다!)
해당 게시글은 2022년에 쓰인 글로,
네이버 블로그에 포스팅한 게시글을 브런치에 재업로드 한 것입니다.
2023년은 홀수 해를 맞이해 홀수달에 발행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