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목: 필요한 허상

by 레마

어린 시절에 본 사극에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단어 중 하나는 '명분'이었다. 이익집단에 해당하는 어떤 세력이 자기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내세우는 표면적 이유라고 이해했다. 명분을 네이버에 검색하면 '각각의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일을 꾀할 때 내세우는 구실이나 이유 따위'라고 나온다.


크게 틀린 이해는 아니었으나, 나는 늘 후자의 '내세우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세운다는 표현 자체가 사실이 아님에도 기저의 목적이나 일을 행하기 위해 거짓으로 덧씌운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자라고 보니 세상이 온통 명분이라 다소 실망스럽다. 대의는 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여겼다.


내가 자라며 이해하게 된 명분은 정당성의 부여에 그쳤다. 회사 단위로 들어오니 명분이 세밀화된 꼴로 '명목'을 느낀다. 어떤 일을 하든 명분과 명목은 반드시 필요하다. 무언가를 더 나은 방향으로 끌어가려 한다는 취지를 드러내는 점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이유 없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가 접하는 그 이유들이 허위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지겹고 지난한 감정을 느끼는 때가 늘어나고 있다. 개인은 집단의 대의에 맞서기에 너무 연약한 존재라, 사람들은 각자의 탈출구를 모색한다. 회사일에서 굳이 의미를 찾지 않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버는 장소로 그 의의를 축소하는 식이다.


개인적으로는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성향이다.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로 보내는데 그게 단순히 돈을 위한 것이라면 조금 슬프지 않나? (내가 선택한 가족이 아직 없다는 점에서 위의 예시는 내게 적용되지도 않는다.) 때문에, 나 역시 허상에 가까운 명목들을 대함에 있어 나만의 명분을 늘 찾아야 한다.


내가 이 일들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것 말고 일을 하는 나만의 의의를 찾아 그것을 명분으로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명분과 명목은 허상에 가깝지만 늘 필요하다. (일하는 과정에서 명목 뿐인 일들이 주는 비효율과 불쾌는 일일이 분노하기보다 일상소음 정도로 여겨야 할 듯 하다.)


과연 나는 내게 필요한 추상을 얼마나 구상화할 수 있을까? 늘 궁금해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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