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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지몽 Mar 14. 2023

부탁하기 쉬운 사람이 어디있어?

나는 그냥 체질적으로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게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오며 살았습니다. 정정당당히 내가 받아내야 할 게 있다면 그렇게 요구하면 그뿐이지, 왜 구부정하게 자세 취해가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하느니 그냥 덜 가지고 당당하게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가끔 아이가 처방받은 약의 함량이 맞는지 불안해서 제 38년 친구에게 물어봐 달라고 부탁해도, 늦은시간이어서, 괜히 귀찮게 하는것 같아서, 미안해서 늘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물어보곤 했습니다. 결국 자세히 물어보고 나서, 아내를 안심시키고 나서는 늦은시간에 쉬는데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지요. 하지만 친구는 언제나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야 친구끼리 늦은시간이 어디있냐. 이럴때 전화하고 목소리 한번 듣는거지. 아무때나 전화해 "


오늘은, 새로 하는 사업을 위해 오래된 거래처 담당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네비게이션에 30분이 걸린다던 길은, 한시간 반 전에 출발했는데도 도착을 못했더랬습니다. 가던 길에 차가 막혀서 약속시간에 10분 정도 늦겠다고 말했더니, 상대방은 오늘 선약이 있어 더이상 기다리기가 어렵다고 하네요. 그럼 나랑은 10분이상 대화를 할 생각이 없었던건가 싶어 불쾌했지만, 참아야 했습니다. 내 자존심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일을 위해서는 이런것에 자존심을 부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나는 다시한번 부탁했습니다.


" 아 그러면 다음에 다시한번 시간을 내주세요. 제가 늦어서 못뵙고 가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


전화를 끊고는, 아무도 없는 차 안의 공기에게까지 창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야 너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사는 사람이라며, 차라리 그냥 덜 가지고 당당하게 산다며. 이렇게 저자세로 부탁한다고? 니가? 라고 나를 둘러싼 공기가 말하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잠시 차를 갓길에 세우고 창문 네개를 다 열어 환기를 시켰습니다.그리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분하지만, 분하면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우리 아버지도, 자식들 키우시려고 장사하시고 지금은 강남 어디엔가 있는 빌딩에서 경비를 하면서 남에게 부탁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고 살고 계시고, 우리 어머니도 가사도우미를 하시면서 누군가에게 허리를 굽히고 계십니다. 내 부모님도 생계를 위해, 자식들에게 손 안벌리기 위해  65세, 70세가 되신 분들이 지금도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고 부탁하며 살고 계시는데, 나만 40평생을 꼿꼿이 서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아침시간에 여유가 생겨 아이와 아내와 함께 간 어린이집에서도, 나도 모르게 선생님과 인사할때 잘 부탁드린다며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나왔습니다. 선생님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무언가 잘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남들처럼만 잘 돌봐달라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도 선생님께 90도로 인사하라고 시켰지 뭡니까. 부탁이란 이런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그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고마워 하면서 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데, 왜 저는 그걸 누군가에게 굴복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을까요? 지기 싫어서 일까요? 아니면 이미 누군가에게 지고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속이는 방어행동이었을까요? 어떤 것이던간에 참 쓸데 없는 자존심을 부리며 살아왔네요.


겸연쩍고, 불편하고, 미안하고 해서 그냥 참는다고 부탁을 하는 일이 없어질까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많아지고 커질수록, 나의 사람이 많아질 수록 부탁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회피한다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여태껏 고고한척 실컷 회피했으면,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성장하고 평온해 지고, 행복해 질 수 있으니까요.


까짓것, 부탁하는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나와 우리가 잘 되고 평안하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요. 그게 법을 어기거나 떳떳한 것이 아니라면 이제 저는 어떤 부탁이라도 하겠습니다. 값싼 자존심은 충분히 챙겼고, 이제는 값비싼 것들을 한번 고개를 숙일때마다 주워서 챙겨야 겠습니다. 그러다 허리가 아프면 어떻하냐고요? 누워있지요 까짓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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