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접지몽 Feb 27. 2023

마지막 출근

5년을 일했던 사무실의 짐을 정리하니 5박스의 큰 짐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읽었던 책들, 관련 서류들을 하나씩 정리하다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기억납니다. 그땐 이런일이 있었지 하고 웃음짓기도 하고, 이때는 참 힘들었어 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미 다 지난일이지요. 모든 일이 시간과 함께 희석되고, 희미해 지고, 아련한 기억으로 바뀔 겁니다.


다 정리하고 나니, 내 책상이 이렇게 환하고 깨끗했나 싶습니다. 제 앞 책상을 떡하니 차지했던 40인치 짜리 모니터를 치우니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얼굴이 너무 자세히 보입니다. 그동안 팀원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파티션이 아닌데도 가리는 목적으로 잘 사용해 왔었죠. 가끔 코를 팔때 숨어서 파기도 하구요, 항상 뚱한 표정의 제 모습을 감추는 데도 유용했던 녀석입니다. 이 녀석을 데리고 가는게 제일 큰 일이네요.


처음에는 여기서 생산계획이라는 업무를 제가 한다고 하니, 코딱지만한 모니터로는 도저히 보는게 한계가 있어 아내가 선물해준지 한달도 안된 모니터를 데려다 놓은지가 5년이 되었네요. 그동안 이 모니터가 저한테는 큰 안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제 짐중에 가장 고마운 녀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날까지 저희 팀 동료가 저에게 업무얘기를 합니다. 그런건 이제 신임팀장하고 상의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묵묵하게 들어주고 제가 생각하는 해법을 이야기 합니다. 마지막 날이어도 왠지 밥값정도는 하고 나가는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하구요. 어차피 제가 말한대로 할지 안할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후에는 돌아다니면서 고마웠던 분들, 미웠지만 풀고 가고 싶은 분들에게 한분씩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5년이라는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앙금과 원망이 이 조직에 쌓였을까요? 제가 나가면서 한꺼번에 털고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저 가서 웃으면서 인사하고, 미안했다, 고마웠다 하고 말하는 것이 제가 할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이제 모든 정리를 마쳤습니다. 이제 이 노트북을 덮으면, 5년간의 제 자취에 마침표가 찍힙니다. 제가 인사드린 모든분들께서 공통적으로 '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인사치례일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이보다 고마운 말이 없습니다. 그동안 온 힘을 다해서 이 회사에서 일해왔고, 후회없이 새로운 일을 하러 떠납니다. 남아 계시는 모든 분들의 행운을 빕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근길 교대역 풍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