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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지몽 Jun 08. 2023

차가운 바닥에 앉아

오전 9시에는 논현동에서 고객과 2시간 가량 미팅을 하고, 바로 이동해서 수원에서 이번학기 마지막 강의를 마쳤다. 요새 계속된 강행군에 감기가 걸렸고, 종합감기약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었다. 차를 주차하고 잠깐 ㅏ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 오빠 병원 다녀와"


병원을 가는 것 보다는 쉬는게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몸을 잘 치료해 줘야, 계속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겠다 싶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요새 일교차가 심해서 그런지 대기자만 15명이 넘는 병원의 대기실은 앉을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을 비집고 접수를 한 뒤, 막 일어나는 아이와 엄마의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그때, 대표의 전화가 울린다.


" 잠깐 화상으로 회의 참여할 수 있으세요?"


공손한 말투이지만, 뭔가 짜증과 다급함이 묻어있다. 헤드셋이나 이어폰을 안가지고 온 터라, 병원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통화소리에 불편하지 않을 장소를 찾다가, 빌딩의 비상출입구가 있는 구석자리를 찾아서 화상회의로 들어갔다.


" 저희 내일 알파테스트 진행되는거 아시죠? 그런데 우리 준비가 하나도 안되어 있네요? 어떻게 제안할 것인지 어떤 기업들을 범위로 제한할 것인지, 고객의 거래처에게는 어떤식으로 안내가 갈 것이며 회원가입안내 등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정해져 있는게 전혀 없습니다. 우리 너무 느슨하게 일하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스타트업은 다음달을 어떻게 넘길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우리는 안정적인 재정이 있어서 다들 그것을 믿는 것은 아닌가요? 이렇게 일하는건 아닌것 같습니다"


잠깐 통화를 한다던 시간은 한시간을 넘기고 있었고, 병원에서는 나를 찾는 전화가 계속 오고 있었다. 서서 전화를 받던 나는 쭈구려 앉았고, 이내 엉덩이를 차가운 바닥에 철퍽 주저 앉혔다. 내 몸의 자세가 낮아질 수록, 내 마음도 무너지고 있었다. 느슨하게 일한다라.


서울에 고객사가 몰려있는 경우는 하루에 3건의 미팅을 한다. 이동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고객과 만나고 영업을 하는 것이다. 지방에 있을 경우는 오전에는 지방, 오후에는 서울의 미팅을 소화한다. 한달동안을 정신없이 전국을 누비며 고객을 만나고 영업을 성사시킨 사람한테 느슨하다라.


알파테스트를 승낙받고 기회를 얻은건 분명 나의 영업에 결과인데, 그 이후의 과정을 누군가 준비하지 않았고, 나도 그 누군가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싸잡아서 잘못되었다고 평가받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스타트업의 문화도, 영업이라는 직무도 처음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이 과연 처음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 본다


" 각자 제 얘기 듣고 하실 말씀 있을까요?"


대표는 본인 속에 있는 말을 한시간동안 잘도 다 쏟아낸 듯 싶다. 마음이 좀 가라앉았나 보다. 이제 내 차례.


" 제가 드릴 말씀은 다음에 정제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모두 반성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제가 과연 뭘 반성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 스케쥴과 고객상담내용에 대한 정리는 실시간으로 공유드려서 다들 알고 계실것이고, 매일매일 전국을 계속 누비며 열심히 영업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실겁니다. 그런데 느슨하다. 안일하다 라고 표현하신게 맞는지도 깊이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마자 베터리가 나가버렸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다. 더 베터리가 있었으면 격한 말이 나갔을 것이다. 아직 우리의 서비스는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지금 우리 팀이 붕괴되면 그동안 나의 고민과 시간 그리고 쏟아부은 열정은 하늘에 먼지처럼 흩어질 것이다. 차라리 잘 되었다.


병원에 들어가서 다시 접수를 하고 기다리기를 30여분, 의사 선생님이 한참 진찰을 하시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코 안이 다 헐었네요. 고름도 꽉 차있고. 최근에 무리하는 일이 많으셨나요?. 좀 강한 항생제를 써야겠습니다."


적어도 내 몸은, 내가 느슨하게 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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