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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지몽 Nov 03. 2023

웃어 넘겨요

아침 7:30분


평소같으면 한참 달리기를 하고 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침대에 있었습니다. 감기가 너무 심해져서 전날 독한 약을 먹고 깊게 잠들어 있었거든요. 띵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은데, 꿈이겠지 하고 넘겼습니다. 다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급한 볼일이 있나 봅니다.


"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정말 죄송합니다. 저 1층 사는 사람인데요, 오늘 이사짐이 나가야 되서요. 차좀 빼주시겠어요?"


왜 이렇게 예의가 없을까? 미리 좀 알려주지! 하는 불평이 스쳐갔지만, 그 불평을 화로 끌어 낼 기운이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나오지 않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 하고는 옷을 주어입고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며 1층에 살았던 이웃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담배도 안 피우고, 시끄럽지도 않고, 항상 집 주변을 깨끗하게 하는 이웃이었습니다. 저희 아이도 너무 예뻐해 주시구요. 잠시 스쳐갔던 불평은 이내 아쉬움으로 바뀝니다.


" 오늘 이사 나가세요? "

" 네네 아침부터 죄송해요"

" 아닙니다. 차 빼드릴께요 잠시만요"


잠이 덜 깬 상태로 시동을 걸고 차를 골목의 앞쪽으로 움직였습니다. 이사짐 차는 총 두대가 왔는데, 내가 주차했던 한대의 차가 제가 주차한 자리로 오고, 두번째 차가 그 앞으로 움직여야 되는 상황이었지요. 저는 두 차량의 자리를 만들려고 제 차를 앞으로 쭉 빼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두번째 차를 운전하시는 분이 저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 제차 움직이면 이쪽에다가 대시면 안돼요?"


이쪽이라고 가르키는 곳은 다른 빌라의 주차장이었습니다. 이삿짐 차가 앞뒤로 붙어 있고, 제 차가 그 앞에 있으면 이사하기가 아무래도 불편했나 봅니다. 그래서 저한테 잠시 다른빌라의 주차공간에 차를 대 놓으면 안되냐고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아침 출근시간에 제가 다른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에 차를 세워놓으면 또 차를 빼 달라는 요구를 받을게 뻔해서, 저는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 여기다가 차를 주차하면, 아침에 출근하시는 분들이 불편하실 것 같은데요? 저도 또 내려와야 하구요"


저는 나름대로 예쁜 말 (감기가 심해서 목소리는 잘 안나왔지만) 로 제가 두번 일을 해야하고 다른사람에게 피해를 주는게 좋지 않다고 말씀드린건데, 그분은 그건 본인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듯 저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그냥 여기다가 대면 안되나?"


당신 말은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사람의 사정은 나는 모르겠다는 태도, 나는 존댓말로 공손하게 이야기 했는데 갑자기 반말? 평소같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갈 이 사람의 거슬리는 태도가, 오늘 아침에는 아파서 힘이 없어 그런지 화로 끌어내 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웃음이 나왔습니다.


" 안되지 않을까요? 여기다가 대면?"


그분은 제 말을 듣고서 중얼중얼 거리며 차를 이동시킵니다. 될것 같은데 될것 같은데 하면서요. 


두번째 차가 자리를 잡고서, 저는 동네를 한바퀴 빙 돌아서 이사차량 뒤쪽에다가 차를 세웠습니다. 이사하는 분들께 여기다가 차를 대면 불편하지 않으시겠냐고 확인차 여쭤 보고 말이지요. 괜찮다는 확인을 받고 시동을 끄려고 하는데, 아까 봤던 두번째 차의 운전자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거기다가 차 대지 말고 잠깐 골목길 중간에다가 대세요"

" 길 가운데다가요?"

" 네 저희가 출입문으로 짐을 나르기는 하는데, 혹시 창문으로 짐이 넘어와야 될 수 도 있어서요"


1층 집이라 창문으로 짐이 넘어오려면, 두껍고 용접이 되어 있는 방범창을 떼어 내야 되서 가능성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짐을 옮기는 다른분들은 다 괜찮다고 하시는데, 창문으로 짐이 나갈지 안나갈지 알 수 없었그요. 무엇보다, 저희 집 근처 3개 빌라에 사시는 분들이 지나가는 공간이라서 골목길 한가운데를 막는건 좀 곤란했습니다.


" 제가 골목길 가운데다가 주차하면 아침에 출근하시는 분들의 차가 다 꼬여버려서 어려울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이분이 굉장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 될것 같은데?"


저는 아까보다는 더 짜증이 났지만, 이렇게 말씀드리구요


" 안되지 않을까요? 여기다가 대면?"


그분은 아까와 똑같이 될것같은데 안된다 그러네 하고 중얼중얼 거리면서 이사짐이 옮겨지는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마치 아까의 상황을 복사해서 붙여놓은 것 같습니다.


잠시 후, 저는 집에 올라가서 아내와 아이와 아침을 먹었습니다. 아내가 아래집 사람들이 오늘 이사간다고 말했는데 기억을 못했다고 합니다. 역시 늘 경우가 바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새로 들어올 이웃도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화제가 아까 본 두번째 차량의 운전자에 대해서 이어졌습니다.


" 참 독특한 아저씨였어. 평소같으면 나도 짜증내면서 이야기 했을텐데, 감기기운에 목소리가 안나오니까 나도 웃으면서 안되지 않을까요? 여기다가 주차하면? 이렇게 이야기 했다니까. 중얼중얼 하면서 걸어가는것도 마치 무슨 코메디 콩트 같았어 웃기더라고 하하."


아내랑 다시 생각해 보니 웃긴 코메디의 한 장면 같아서 웃으며 이야기를 했는데, 아내가 저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 오빠. 나는 지금이 딱 좋아. 조금 짜증나더라도 웃어 넘기는거"


모든걸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비판하고 안좋은 상황을 상상하는 태도 보다는, 오늘처럼 그냥 가볍게 생각하고 웃어 넘기는 저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고 하네요. 저는 힘이 없어서 그런건데.


생각해보니, 그동안 너무 힘이 넘쳐서 그냥 웃어 넘어가도 되는 많은 삶의 장면장면에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아 부었네요. 몸이 아프니까 작은 힘을 쏟아야 할 곳에 집중하게 되고, 불필요한 부분이 어디였는지 스스로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지요. 아내가 웃으며 넘기니 너무 보기좋다고 말해주어서 깨닫게 된 것이지요.


감기는 내일쯤이면 나을 것 같습니다. 제 에너지도 다시 돌아올 거구요. 하지만 내일부터는 왠만한 일은 웃어 넘기려고 합니다. 웃어 넘기고 나서 남은 제 힘은, 더 가치있고 보람된 곳에 쓰이도록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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