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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설 Oct 01. 2020

III. 나를 성장시키는 회복탄력성

한 사람이면 족하다

내가 삼십 대와 사십 대의 청춘을 보낸 외대부고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이다 보니 그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다. 물론 현재 핫이슈가 된 제자인 ‘기생충’의 샤론최, ‘하트시그널’의 천인우, KBS 아나운서 박소현, 연합뉴스 석지연, 유시민씨의 딸로 더 화제가 된 유수진 등이 외대부고 출신이다. 이들은 아무래도 나름 잘나가는 집안의 자녀들이다. 하지만, 흔히들 얘기하는 요즘 말로 개천에서 용나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이 외대부고에 정부 정책에 따라 사회적 배려 대상자들이 입학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앞날이 기대되는 제자가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다. 학생이 아닌 친구라고 소개하는 이유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사제지간을 넘어 인생을 함께 살아하는 동지적 관계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의 이름은 승범이다. 정말 ‘인간 승리’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열심히 사는 친구다. 승범이는 경제적 차상위계층, 그러니까 사회적 배려 대상자로 외대부고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지 행방을 모르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재봉 일을 하시며 하루하루 근근이 생활을 이어 나가셨다. 젊었을 때 승범이 어머니는 유명디자이너 의상실에서 일할 정도로 촉망받는 디자이너였는데,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로 가계가 어려워지자 생계를 꾸리느라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야 했다. 정말 열심히 사셨다고 한다. 

입학 초기에 승범이의 성적은 바닥권일 정도로 공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그 후 과외 한번 받지 않고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성적을 꾸준히 올렸다. 결국 수시로 서울대학교에 1차로 합격할 정도의 실력을 자랑했다. 안타깝게도 2차 면접에서 교수와 논쟁이 붙는 바람에 최종으로 합격하지는 못했다. 승범이는 다시 도전해서 S대 경영학부에 합격했으나 자신의 목표에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또다시 도전해서 Y대 국제학부에 입학했다. 그리고 지금은 로스쿨에 진학해 법조인이 되어 이 세상에 정의를 실천하겠다는 꿈을 안고 살아간다. 

구김살 없고 넉살 좋은 승범이를 생각하면 참 대견스럽다. 고등학생 때는 교복만 입으면 되니 옷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지만 대학에 다니면서는 멋있는 옷도 사 입고 싶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아끼던 옷과 잘 입지 않은 옷을 골라 다섯 상자를 꾸려 택배로 재호에게 보냈다. 남이 입었던 옷이라 꺼릴 만도 하건만 도리어 승범이는 “선생님이 입던 옷이라 그런지 더 애착이 간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나는 승범이가 반드시 멋진 어른이 되리라고 자신한다. 왜냐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삶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 힘겹게 세상을 살아보았기 때문에 쉽게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지녔다. 승범이의 이런 힘이 바로 회복탄력성이다. 

승범이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어떻게 해서 강력한 회복탄력성을 지니게 되었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회복탄력성》에서 소개된 에미 워너 교수의 카우아이섬 연구 결과가 떠오른다.

소아과, 정신과, 심리학 등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일군의 미국 학자들이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원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겪는 여러 건강 문제나 사건 사고, 그리고 태어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가정환경이나 사회경제적 환경이 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얼마나 미치는지를 수십여 년간 추적조사하는 종단연구였다. 

연구 대상 지역은 하와이 카우아이섬. 당시 카우아이섬은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이어서 지금보다 더 심한 오지였는데 주민 대부분은 극심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범죄, 알코올의존증,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이 많은 아주 열악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1954년에 이 섬에 들어간 학자들은 1955년에 섬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 833명을 관찰, 조사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예컨대 엄마가 알코올의존증이면 자녀 역시 알코올의존증에 걸린 확률이 높은지 따위 어린 시절에 겪은 어려움과 훗날 일어날 문제의 인과관계를 연구할 목적으로, 833명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나고 자라 201명을 추렸다. 그들은 극빈층이고 가정불화가 심하거나 부모가 별거나 이혼을 한 상태이거나, 부모가 한쪽 또는 양쪽이 알코올의존증이나 정신질환을 앓는 등 고위험군에 속한 아이들이었다. 에미 워너가 그들의 성장과정을 기록한 자료들을 검토해 보니 실제로 다른 집단에 비해 이른바 사회부적응자로 자란 경우가 훨씬 많았다. 201명 중 3분의 2가 그러했다. 

그런데 여기서 워너 박사는 새로운 의문을 품었다. 똑같이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서 사회부적응자가 되어도 별반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이들 가운데 3분의 1인 72명은 왜 사회부적응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뿐 아니었다. 그들은 미국의 대학입학 자격시험 성적이 전미(全美) 상위 10퍼센트 안에 들 만큼 학습 성취도가 높고 교우관계가 아주 원만하며 자기 진로를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있는 청년을 비롯해, 성격 좋고 긍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며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로 자라 있었다. 워너 박사는 그 72명에게 공통된, 역경에 굴하지 않고 훌륭하게 성장한 힘을 바로 ‘회복탄력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이후로 연구를 계속한 워너 박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제대로 성장해 나가는 힘을 발휘한 아이들이 예외 없이 지니고 있던 공통점”(《회복탄력성》 54쪽)을 한 가지 발견했다. 바로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고 받아주는 어른의 존재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이가 기댈 언덕이 되어 준 어른이 인생에서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부모가 아닐 수도 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또는 친척 중의 누구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학교 교사나 지역사회의 누구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에게 세상은 온통 낯설고 신기한 것투성이었다. 인생을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하루하루가 새로운 세상이지 않겠는가. 그 세상에서 실수, 실패가 무엇인지 아이가 스스로 알 수는 없다. 우리는 애초에 무엇이 실수이고, 실패이고, 잘못된 행동인지를 모른다. 곁에 있는 부모나 교사가 어떤 행동에 대해 “안 돼” “하지 마” “틀렸어” 등을 큰소리로 말하니 아이는 움찔하게 되고 어떤 행동은 실수, 실패,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관계에서 이런 부정적인 말을 수도 없이 들은 아이와 긍정적인 말을 많이 들은 아이는 다르게 성장할 수밖에 없다. 사물을 대하는 자세부터 다르다.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사랑과 신뢰를 받으며 자란 사람은 긍정적 사고를 가지게 된다. 내가 실패를 해도 실수를 해도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 어려운 일이 닥쳐도 위기를 이겨내는 회복탄력성이 높아진다. 좋은 인간관계, 긍정적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만큼 회복탄력성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승범이는 수십 년 전 카우아이섬의 아이들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그런데 외대부고 재학생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에 재호의 힘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궁금했는데, 승범이에게도 그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어른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어머니다.  

한번은 승범이와 소주를 마시며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터놓고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재호는 삶이 때로는 너무 버거워서 감당이 안 될 때도 있지만 자기가 흔들리지 말고 바로 서야 한다고 했다. 자기가 흔들리면 힘겹게 고생하시는 엄마가 얼마나 힘들어하실지 생각해 본다면서. 승범이가 마침내 연세대에 합격했을 때 엄마는 하염없이 우시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우리 범이, 엄마가 해 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잘 자라서 고맙고 고맙다. 세상에서 우리 범이가 가장 귀한 보배야.”  

승범이는 엄마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며 엄마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꼭 세상에 도움이 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재호를 향한 엄마의 무한한 사랑이 내게도 전해졌다. 그 사랑이 승범이에게 크나큰 힘이 되었으리라.

문득 승범이가 말했다.

“예전에는 선생님이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선생님이 큰형님처럼 느껴져요.”

승범이가 나를 그렇게 가깝게 느끼다니, 순간 마음이 설렜다. 내가 재호에게 조금이나마 기댈 언덕이 되었을까? 그러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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