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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Aug 12. 2024

단 하나의 미제

백일 동안, 다시 백일 동안

루시드 폴, 빛



설아에게


 설아야, 안녕. 잘 지냈니? 오랜만이야. 나 은정이야, 조은정. 결혼 축하한다는 연락이 마지막이었는데, 이렇게 쓰려니까 마음이 이상하네.


 진훈이가 출판사 대표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 엄청 자세히 적었던 여행 말미의 기록을 다 찢어버려서 이야기가 너무 애매하게 끝났네. 진훈이는 사흘 전에 세상을 떠났어. 보내주고 돌아와서 이 글을 쓰고 있어. 독자들도 생겨 버려서 어떻게 할지 고민했는데, 진훈이 몫까지 너에게 편지를 쓰는 편이 제일 나은 것 같아. 진훈이는 아닐 거랬지만, 난 네가 이 글을 분명 읽을 거라 생각하거든.

 어휴, 솔직히 얼마나 부담이 될까. 이젠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 네 이름을 계속 꺼내고, 너에게 쓰는 편지를 출판까지 하겠다며 고집 피우는 것 말야. 나도 원래는 진훈이에게 뭐라고 했어. 너 그거 예의 아니라고. 걔도 처음에는 끄덕이다가 나중엔 너와 헤어진 뒤에 군대에서 받았다는 편지를 보여주더라. 미안해, 본의 아니게 네 속마음을 읽은 것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어. 와중에 너희도 참, 21세기에 손편지로 사랑을 하고 있더라. 너의 편지를 읽은 뒤로, 또 진훈이의 끝을 함께하면서 나도 너희를 더 이해하게 됐어. 이 글을 응원하게 된 건 물론이고. 네가 궁금해할 만한 점들을 진훈이를 대신해서 최대한 들은 대로 써 볼게. 진훈이가 이런 나를 굽어봐주겠지. 하늘에서는 좀 편안했으면 좋겠네.


 우선, 같이 여행 갔다가 사라진 종성이는 다행히 얼마 전에 돌아왔어. 진훈이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쯤이었을 거야. 연락이 안 됐던 건 아냐. 여섯 번째 비밀 장서관이라는 바람의 미술관은 실제로 있었대. 찾는 데 두 달, 매일같이 폭설을 헤쳐다니는 동안 자꾸 실종 소식이 들려서, 자기도 그 저주의 대상이 될 줄 알았다나. 근데 다니다 보니 이게 꼭 저주 때문이 아니라도 자칫하면 죽겠구나 싶다더라. 눈발도 바람도 너무 센데 차는 안 굴러가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여튼간, 그곳이 워낙 지대가 높아서 네트워크가 잘 안 되는데 카톡은 또 오랫동안 안 들어가면 대화가 지워지잖아. 그니까 진훈이와 종성이는 서로에게 계속 딴 소리만 해댄 거야. 물론 같이 간 진훈이를 쏙 빼놓고 떠나버린 종성이 책임이 커. 사실 종성이는 우리가 이렇게까지 걱정할 줄 몰랐다는데, 문제가 우리뿐이냐, 부모님은 또 어쩌고. 뭐, 살아왔으니 다행이지만.

 그토록 원하던 걸 결국 찾아냈으니 들어가서 딴 생각할 새가 없지. 틀어박혀서 연구만 했대. 제리 초가 많이 도와줬다더라. 제리 초도 사람이 좀 괴팍해서 그렇지 진훈이 생각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었나 봐. 애초에 예술계에서 유명한 사람이라니까, 나쁘게 살기도 힘들겠지. 그러던 어느 날 타이밍이 맞아서 종성이가 우리 카톡을 읽게 된 거야. 그 내용이야 뭐 당연히 진훈이가 오늘내일한다는 거였고.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대. 하기사 얼마나 놀랐겠어. 진훈이가 자기 아픈 걸 입원하기 전까지는 아무한테도 안 얘기했으니까. 지도 그리는 데 1주, 들어갔던 그대로 빠져나오는 데 3주. 다행히 진훈이는 그로부터 한 달 넘게 살았고, 죽기 며칠 전 종성이와 재회했고, 웃는 게 힘들 텐데 그렇게 웃더라. 박종성은 무지하게 울었고.

 종성이는 곧 또 출국이야. 그 어려운 길을 다시 뚫고 바람의 미술관에 가겠대. 눈보라 편지의 진상을 아직 밝히지 못했다나. 거기 연루된 사람들 중에 한 명은 이미 만났대. 한재이. 우리랑 나이가 비슷해서 금세 친해졌다는데, 알고 보니 원래 한 씨 성이 아니었다나 봐. 박 씨였는데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딸들 성을 바꿨대. 뭐, 여기 꼭 필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아이라 마리와도 딱히 별일이 없었나 봐. 마리는 바람의 미술관은커녕 제리 초도 모르는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조잔케이 료칸 지하실 문은 사실 닫으면 자동으로 잠겨서 밖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이었대. 애초에 그 방은 방문객 들어가라고 둔 방이 아니라더라. 위층 복도에 둔 장식용 피아노를 아무나 와서 치니까 시끄러워서 공실로 옮겨 둔 거야. 료칸은 기본적으로 조용한 곳이잖니. 층과 층 사이가 되게 넓은 것도 층간소음 방지 때문일 거야. 하지만 진훈이는 종성이도 갑자기 떠나고, 낯선 여자를 두 번이나 나타나 들이댔다가 사라지고, 문은 잠기고, 인기 없는 어떤 노래가 타이밍 절묘하게 자꾸 들리니까 불안이 극도로 심해졌겠지. 병약한 상태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실은 시시각각 얼마나 무서웠겠니. 진훈이가 원래도 예민한 편인 건 우리가 다 알고. 그렇게 이해하기로 하자. 마리는 진훈이가 노래에 너무 집중하는 눈치라 몰래 화장실 갔다가 캔맥주를 사오고 있었대. 편의점 찾아 헤매다 늦었고, 문이 잠기는 줄 몰랐던 건 당연하고. 내가 보기에 아이라 마리는 삿포로역에서 우연히 다시 만날 때까지도 별 생각 없다가 버스에서 얘기하면서 진훈이에게 호감을 느낀 것 같은데, 둘이 바보같이 연락처도 안 주고받아서 마리는 진훈이가 세상을 떠났는지 모를 거야. 내가 있는 대학원으로 유학 온다니까 나와는 만날 수도 있겠다.

 진훈이에게 형님 김진환 씨가 있었다는 건 주변에 아무도 몰랐어. 일찍이 돌아가셨다는 것도. 지금쯤 진훈이와 같이 계시겠지. 둘 다 전보다 행복했으면 좋겠네.

 아 그래, 맞다. 그 '나무 아래에서'라는 노래 있잖아. 나도 진훈이에게서 처음 들은 노래거든. 알고 보니 그 노래 만든 사람이 우연히 진훈이와 여행 동선이 겹쳤대. 전언호라는 젊은 가수인데, 그러니까 그 가수가 자기 친구와 여행하다가 밤늦게 제리 초에 들어가서 자기 노래 홍보하고, 모레는 그 료칸을 돌아다니다가 지하실 피아노를 발견해서 영상이나 찍을 겸 자기 노래 연주한다는 게 진훈이와 타이밍이 엮인 거야. 진훈이는 가뜩이나 모든 게 의심스러운데 그 노래마저 들리니까 신경증이 폭발했고. 어휴, 그 가수분은 뭔 죄니. 생각해 봐. 카메라 켜놓고 막 감정 잡으려는데 천장에서 갑자기 사람이 쿵 떨어지는 거야. 난 놀라서 까무러쳤을 듯. 공포영화가 따로 없다니까. 근데 그분도 대단하시더라. 진훈이가 정신 차리고 보니까 방에 사인 CD에 초콜릿까지 두고 가셨대. 신기하지 않아? 난 이 얘기가 제일 신기하던데.


 적으면서도 느끼지만 참 특이한 여행이야, 그렇지 않니? 난 이런 여행은 들어본 적도, 해본 적도 없어. 게다가 결론은 또 어찌나 이상한지. 그래서 사람들이 더 못 믿나 봐. 난 믿기기는 하거든. 아, 종성이 때문에 크로스체크가 돼서 더 신뢰가 가는 건가. 글쎄, 그게 아니여도 난 진훈이 얘기을 믿었을 거야.

 일단 이 정도가 진훈이가 "별일 없었다"고 쓴 내막이야. 이밖에도 물어보고 싶은 게 생기면 언제든 연락 줘. 진훈이가 네게만은 알리지 말아 달래서 이제야 부고를 전해. 한창 신혼일 때라 안 말할까 싶었는데, 분명 언젠가는 듣게 될 테니까. 나중에 들으면 오히려 네가 감당을 못 할 것 같았어. 내 판단이 맞아도, 아니어도 똑같이 실례하는 기분이네. 진훈이는 많은 사람들의 배웅 속에 귀천(歸天)했으니, 혹시라도 너무 황망해 말기를. 대신 시간 될 때 진훈이를 위해 기도해 주렴. 진훈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너는 또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결국 너희 각자만이 온전히 알 거라 믿어. 진훈이를 둘러싼 많은 일들 가운데 그것 하나가 미결(未決)로 남네.



그것만으로도 난 바랄 게 없지만

김동률, 동반자



 그리고 진훈이의 글을 읽어주신 고마운 분들께, 원작자도 아닌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놀라셨죠. 진훈이가 원래 적어둔 결말부를 대부분 찢고 다시 쓰지 못해서, 친구인 제가 들은 대로 옮기게 됐어요.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형님에 대한 장(‘시절의 인사’)를 읽으셨을 테니, 그분처럼 비명횡사는 아니지만 진훈이도 내내 몸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진훈은 참 좋은 사람, 따뜻한 사람, 세상의 모두가 다 알아줘도 모자람 없는 멋진 사람이었어요. 비망록 속에 허물이 보여도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 주세요. 혹시 들으면 속상해할 거예요.

 아래의 글은 진훈이가 이번 장에서 유일하게 찢지 않은, 어쩌면 이 여행을 통틀어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는 말이에요. 일종의 라스트 레터처럼.



자못 가냘픈 마음으로

난 여전히 나의 길을 가고

이내 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려도

단 한 순간도 널 잊지 않으니

언젠가 내 약속이 지켜지면 넌 웃어주겠니

긴 여정에 늘 네가 함께였음을 믿어주겠니



 진훈아. 네 마지막 이야기를 내가 대신 전할 수 있어서, 우리가 진훈이의 친구여서, 너의 사랑이 담긴 여정에 함께일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잊지 않을게. 고마워.



2024. 7. 9.

조은정




*"1. 당역은 겨울"은 "2. 낭만적 작가주의"로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2. 낭만적 작가주의: https://brunch.co.kr/brunchbook/romanauteuris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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