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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Aug 09. 2024

어둠은 참호처럼


김진훈 님께


 대산문학상의 심사평을 빌려, 한국 소설은 그 "왕성한" 힘이 줄어들 날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에 우리 출판사에서만 천 권이 넘는 책을 발간했으니, 이를 소설의 "해일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입니다. 지난 "달포" 동안 우린 당신의 작품을 비롯한 수백 편의 소설을 검토하면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되물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마다 작은 경이감을 전달하는 것이 소설이 있을 자리이며, 그렇게 볼 때" 당신의 작품은 우리에게 뚜렷한 감동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 출판위원 일반의 의견입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따로 드리는 까닭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먼저 이것이 젊은 예술가의 혈기를 꺾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해에만 수천 편이 넘는 작품 발간을 의뢰받는 우리로서 일일이 반려의 글을 적어보낼 여력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 조심스러운 말이 찬사로 들리길 바라건대, 작품에서 드러난 몇 가지 소설적인, 혹은 개인적인 결함을 수정한다면 당신의 독특한 열정은 대기만성하겠다는 생각에 당신에게만은 글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첫째, 당신이 보낸 『당역은 겨울』의 구성은 연서와 수기가 불균등하게 연결된 서간체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결합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비일관적 시도에는 여느 때보다 치밀하게 직조된 플롯이 요구됩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등에서 단서를 얻기를 권합니다. 소설의 결을 따진다면 『리스본행 야간열차』도 도움이 될 겁니다. 구태여 한국 소설은 적지 않겠습니다. 그 까닭이라면,

 둘째, 당신은 근현대 흔히들 레디메이드 사이에서 유행한 고지식한 문어체를 쓰고 있습니다. 문학은 시대의 반영이고 소설은 그의 가장 범용한 번역수단이므로 현대의 경향을 묵인해서는 안 됩니다. 쉽게 말해 대중은 당신의 어투를 이미 지나간 세대에 대한 어설픈 동경이나, 고전깨나 읽은 식자의 허영으로 오인할 우려가 있습니다(달리 말하면 당신의 문체로써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접했을 최인훈 계통의 한국 소설이나 뭇 문학비평을 포함해, 작중에 차용한 『장미의 이름』과 『개선문』 따위의 번역서에 지나치게 경도되지 않는 편이 당신의 발전에 유용할 겁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 주변을 넘어 만인에게 다가가고 싶다면 말입니다. 구병모나 최은영 같은 근래 문단의 총아들에게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당신의 소설은 아직 주제의식이 모호합니다. 소설은 하나의 단어로도, 수십 장의 논문으로도 다시 적힐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의도를 위해 과하게 장황한 수사를 동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독자의 이해가 명료하지 못한 것에 작가의 귀책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해석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그 생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의 고독을 잘 다듬어 단정하게 만드십시오. 죽음을 아무렇게나 사용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그저 멋을 부리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독자들은 당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타 작품을 차용하되 출처를 기록하지 않는 습관은 매우 위험합니다. 출판사의 검토를 거치기는 하나, 매일 방대한 양의 텍스트를 접하는 우리로서 작중의 모든 출처를 일일이 파악해 주석을 달기는 어렵습니다. 이 글을 드리겠다는 의도가 없었다면, 세, 네 번째 장에 등장하는 인물과 설정, 그리고 다섯째 장의 그럴싸한 허구는 우리마저 간과했을 겁니다. 그리되어 당신이 비평계의 따가운 질타에 무방비로 당하는 것은 출판사 입장에서도 패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말이 듣기 거북할지라도, 수많은 열정을 결괏값만으로 재단하는 숙명에 놓인 어느 중개인이 손꼽아 건네는 조언이라고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이를 숙고한다면 당신의 습작은 분명 몇 배 영글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을 극복하기 위해 너무 목 매지는 마십시오. 무책임한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처럼 우리 또한 어떤 면에서는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뒤쳐져 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젊습니다. 당신은 모든 시작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당신은 고통스럽겠지만, 젊음이 한 순간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중한지 알 겁니다. 그 시간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먼저 지나온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바랍니다. 당신에게서 될성부른 떡잎의 자질을 느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4. 7. 7.

문예출판 무인도

대표 계 승 호 

발신자 문예출판 무인도, 수신자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335-27, 101호 김진훈



 설아야, 이 편지를 찍은 사진을 받았을 때 난 병원 응급실에서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 무너질 억장도 없었지. 다른 무엇보다 날 서럽게 한 건 내 일기장을 그저 현학으로 치부했다는 것이다. 그깟 소설 나부랭이를 내보겠다고 출판을 의뢰한 게 아닌데. 거짓말을 친 것도 아니다. 제리 초와 친구가 한 말, 내가 본 것 다 그대로 옮겼는데 뭐 어쩌란 말이냐. 그래, 내가 여러모로 멋을 부리며 살아왔다는 건 인정하겠어. 하나 내가 적은 죽음이 어찌 가볍게 여겨진 걸까. 내가 죽어야만 모든 게 다시 보이는 걸까.

극단적인 것 안다. 내 욕심이 크다. 미안하구나.



먼 산 언저리마다 너를 남기고

YB, 너를 보내고



 어젯밤, 어둠이 전보다 바싹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 어둠이 실은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다. 어둠이 공허해서 난 살았다. 어둠이 참혹해도 살았다. 어둠이 비장해지는 때마저 난 살았다. 그런데 어제는 어둠이 너무나도 예뻤다. 조잔케이 료칸의 그 피아노 방 위 천장에서 본 어둠과는 비할 바 없이 찬연했다. 떨어져 머리를 박고 의식을 잃은 피아노 본체 안에서, 어둠 속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형의 발인날 꿈에서 본 불사조의 깃털이었다. 그때는 형이라도 만났지, 어제는 형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난 응급실에 있었다. 응급실 천장의 사각형 틀을 열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생각해서 글까지 써줬다니까, 저 작자가 시키는 대로 해보자. 내 짧은 삶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뭘까. 음, 용기? 아니, 용기나 겁 따위는 삶의 전부를 대체할 용어가 못 된다. 열정? 글쎄. 꿈? 낭만적인 동시에 모호하다. 박애? 난 가톨릭이기는 하나 진정한 박애란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사랑이 아닐까. 사랑. 사랑이야말로 참 갖다 붙이기 나름이니까. 그래, 나의 짧은 삶을 사랑이라 하자.

 사랑이란 결국 사람을 향하는 일이니까, 내 짧은 삶을 늘여 정의하려거든 차라리 함께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는 편이 좋겠다. 어디 보자. 나의 생몰에 관계한 자가 몇인지 세어 보자. 기억나는 자들의 이름을 불러 보자.

 엄마, 아빠, 형, 동생.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척들. 유치원 친구 정은, 봉규, 현진. 이경은 바이올린 선생님. 초등학교 친구 세현, 관우, 호창. 조미연 선생님. 중학교 친구 대성, 건, 주엽, 주혁, 현웅, 승제, 민재, 용석. 최윤정(영), 최윤정(역), 이혜란, 이귀숙, 유미상, 정순의, 노수진 선생님. 고등학교 친구 유민, 욱, 건하, 건민, 성빈, 민준, 영재, 대찬, 동현, 지우, 태훈, 경빈, 준범, 재현, 수정, 예나, 윤지, 서윤, 홍익, 윤모. 정혜윤, 김난경, 신현필, 박진 선생님. 대학교 친구 종성(실종), 효성, 효웅, 정헌, 은성, 수정, 은정, 세준, 현우, 나현, 다현, 예진, 연수, 이수진, 서연, 수연, 수현, 아영, 성민, 정민, 지웅, 동현, 동진, 준혁, 혜수, 장윤, 형식, 원호, 은진, 태희, 소연, 가영, 가진, 인균, 박수진, 재성, 기흠, 영경, 선영, 선진, 영지, 채은, 영주, 영빈, 민경, 녹조, 한수, 민국, 해빈, 현빈, 지민, 가휘. 이영제, 최호철, 장경준, 강헌국, 엄태웅, 김재혁, 도원영, 박재현, 박희선, 김형신, 마동훈 교수님. 군대 친구 석원, 지훈, 현준, 정빈, 건우, 민석, 정민, 준형, 진영, 현진, 도윤, 승진, 건호, 유빈, 세중, 다훈, 재영, 지성, 동화, 동규, 택균, 종민, 동영, 민성, 양정빈, 우현, 민재. 박종민, 고숭규 중위님, 이우람, 정세영, 이강호 중사님, 김영주 상사님, 곽개천 원사님, 이동윤 준위님, 서원형 소령님, 김주환 하사님, 이금숙 주무관님, 김광수, 홍성호, 윤성호 주임원사님. 대학원 친구 예린, 현교, 성연, 예닮, 원, 성진, 예슬, 창민, 다빈, 현민, 라라, 티나, 비쥬. 최유승 감독님, 김영우, 송우진, 정성태, 허림, 유영식, 박리디아 교수님. 성당 친구 진토, 노엘, 나영, 성진. 이예림, 이영아, 심은혜, 김민정, 오지연, 조하은 선생님. 일본인 아이라 마리. 적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인연들과, 그럼에도 적을 수밖에 없는 내 첫사랑 유설아. 이밖에 더 있겠지? 얼마든지 더 있겠지. 이들이 내 장례에 다 올 리가 만무한데다 영영 여기 자신이 등장하는지도 모를 사람들이 많지만 뭐 어떠랴.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다.



그댄 절대 변하거나 하지 마요

가을방학, 이름이 맘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이쯤 해두고,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그래서 피아노에 빠진 뒤에 어떻게 됐냐고? 여기서 출판사가 당황한 것 같기는 한데, 별일 없었다. 난 곧 방으로 옮겨졌고, 의사가 외진을 나왔고, 진찰 결과는 지병과 충격으로 인한 쇼크였다. 난 어느새 돌아온 마리의 간호 속에 안정을 취한 다음 예정된 항공편으로 귀국했다.

 그러니 설아야, 걱정하지 마라.




*본 장의 인용문(출판사 대표의 서신)은 다음 세 편의 자료를 직,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1) 김기택 외, 대산문학상 시 부문 예심평 및 본심평, 대산문화 겨울호, 2006.

2) 김인환 외, 대산문학상 소설 부문 본심평, 대산문화 겨울호, 2006.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김재혁 역,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 네 번째 편지, 여덟 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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