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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Aug 07. 2024

감전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나를 좀 안아줬으면

이영훈, 일종의 고백



 내 개인적인 문제들에 대한 고민은 좋은 세상에 대한 고민과 병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 그만큼 망가져 있었다는 걸 오늘에야 깨달았다. 지쳤다는 건 참 인정하기 싫다. 왜 하필 지금인지, 아니, 차라리 지금이라 다행인지, 고통이 이번엔 대체 무얼 알려주려 내 안에 당도했는지 묻고 싶다.

 전조증상이다. 무언가에 독하게 뛰어들기 직전의 격렬한 방황. 하지만 당장에 놓쳐서는 안 되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초라한 말들로 내 패를 보이기 싫대놓고 다른 아무것에도 제대로 집중을 못 한다. 이런 때는 정말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날 좀 찾아왔으면 좋겠다. 오늘 밤도 가로등 밑에서 헤매는 사람은 나뿐이구나.

 여름날 바람이 서늘해지면 돌아가 우산을 챙겨야 한다. 우산이 막지 못하는 것은 단 하나다. 번개. 이번엔 얼마나 크게 내리꽂히려는지. 예고라도 해주는 건지. 그래서 이리도 나를 흔드는지.

 각주구검, 오래 떠들었다.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설아의 결혼 소식을 듣고 너무 망가졌다. 양해를 구하며, 사족은 이쯤 두고 여행 기록을 잇는다.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김훈, 자전거 여행



 저번에 얘기한 것처럼 아이라 마리는 삿포로역부터 줄곧 나와 함께였다. 그녀가 내게 믿는 것처럼 나 또한 그녀의 여행은 관광이 아니라 믿었다. 그녀가 내게 바라는 것처럼, 난 마리가 이 여행을 무사히 마치도록 도와주길 바랐다. 그래, 나는 외롭게 살아왔다.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덜 외롭고 싶었다. 갑자기 사라진 친구의 빈자리를 마리가 채워줘서 고마웠다. 사실 기적 같았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 안에 누굴 들일 여유를 가져야 사람이 오는 거라고. 사라진 친구 때문이라도 난 별로 여유가 없었는데 어떻게 마리를 만나게 된 걸까? 마리는 날 좋아했을까? 혹은 운명이라 여긴 걸까. 조잔케이에 도착해서 마리는 다소 뜬금없이 실은 묵을 숙소를 예약하지 못했다고 했다. 기어이 내 숙소 앞까지 따라오더니, 대뜸 같이 하룻밤 묵을 수 없냐고 물었다. 그 순간의 내 당혹감은,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상상이 가겠지만, 친구의 실종에 버금갈 정도였다. 마리는 객인인 데다가, 나도 남자다. 뭘 더 어쩌란 말인가.

 난 그녀에게 왜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여길 찾아왔냐고 물었다. 조잔케이는 삿포로 왕복이 골치 아픈 북해도 서쪽의 시골 마을이다. 온천 방문이 아니고서야 여행객이 취할 우선순위는 아니다. 마리는 쑥스럽게, 오면 아무 료칸이나 현장 예약이 가능할 줄 알았다고, 아까 버스를 타서야 위기를 직감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료칸은 거의 모든 객실이 사전 예약이며, 현장 예약의 값은 예약의 두 배 격이다. 그녀의 말을 듣고 미심쩍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갓파라이너 예약은 하면서 객실 예약을 안 했다는 것도 이상하고, 왜 오늘 안에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으며, 일단 택시를 타고 이곳을 빠져나간 다음 근처 마을의 호텔에서 묵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녀에게 더 묻지 않았다. 난 그저 어쩔 줄을 몰랐다.



겨울 철길 위에 핀 꽃처럼

정준일, 얼음강



 마리는 내 불안을 눈치챘는지 외려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숙소 값은 친구와는 별개로 내게 치르겠고, 혹시나 다른 우려를 피하기 위해 본인의 학적사항을 비롯한 각종 신상 자료들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급기야 재학 중인 대학의 소속학과 행정실에 전화를 걸어 입증을 시도했다. 몰아치는 그녀에게 미안해진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실로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었다.

 난 예약해둔 숙소에 그녀와 함께 들어가 호텔리어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상했는데, 이야기를 듣고는 의심 없이 예약 변경을 도와줬다. 난 어느새 아이라 마리라는 사람과 함께 이 료칸을 예약한 꼴이 되고 말았다. 키를 받고 방까지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괜히 휴대폰만 들여다보다 와이파이가 돼서 친구에게 연락이 왔는지 확인했다. 마지막 연락은 오전이었다. 난 어떤 사람을 만나 료칸에 같이 왔으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대신 가능한 때 소식을 전해달라고 보냈다.

 702호. 열쇠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방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20평 정도 되어 보이는 2단 다다미방의 남쪽으로 탁 트인 창이 설산을 마주보고 있었다. 창 맞은편 양쪽으로 옷장, 안락의자, 티 테이블, 소파, 침대장이 데칼코마니처럼 놓여 있었고, 턱을 오르면 돌기가 잘 깎인 짚방석들로 채워진 거실에 커다란 식탁이 있었다. 식탁 위에는 성냥, 아주 작은 솥, 거기 넣어 먹는 키리모찌 몇 개, 료칸 내부 안내도, 규정 등이 적힌 코팅 종이 두 장이 올려져 있었다. 마치 직전에 사령관 순회라도 있었던 양 각이 심상치 않았다. 마리는 그와 같은 풍경이 퍽 익숙한 듯 터벅터벅 걸어가 소파에 눕더니 뒤로 고개를 젖혔다. 난 미닫이문을 열어 사우나 탈의실처럼 된 세면대를 구경한 다음, 냉장고를 여닫고, 화장실 두 개를 들여다보며 전등까지 껐다 켰다 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촌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멋쩍게 마리가 있는 창 쪽으로 갔다. 마리는 그런 나를 향해 생글 웃으며 좋으냐고 물었다. 난 솔직히 이렇게까지 좋은 곳일 줄은 몰랐다고 답했다. 마리는 자기가 있어도 괜찮냐고 물었는데, 난 어찌 대답해야 덜 이상할지 고민하다 상관없다고 답하고는 고개를 다시 창 쪽으로 돌려버렸다. 마리는 일어서더니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저기 아래 보이는 것이 야외 온천이라고 알려주었다. 야외 온천은 흡사 에도 시대 사무라이들의 쉼터 같았다. 열기와 한기가 만나 자아내는 고상한 연기였다. 문득, 거기서 나는 냄새를 향수로 만들면 특산품이 되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는 저녁나절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온천이나 가자고 말했다. 그녀는 장난스레, 남녀가 같이 들어가는 곳도 있을 텐데 가겠냐고 물어봤다. 난 화들짝 놀라서 그런 곳은 못 간다고 잘라 말했다. 마리는 예의 여자들의 그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행여나 기대도 하지 말라고 했다. 난 당황해서 그러마고 했다. 마리는 옷장에서 남성용 기모노 두 장을 꺼내며, 1층에서 하나를 여성용으로 바꿔 올 테니 입으라고 말했다.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민망해서 난 벙어리가 되었다. 그녀가 나가니 갑자기 긴장이 확 풀렸다. 난 소파에 주저앉았다. 설산은 고색창연했다. 낭만이 너무 가득해서 문제였다.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그대들은 이런 여행을 해본 적 있는가? 그걸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대 젊음에 하나의 오점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아에게, 네 결혼 때문에 내가 토라져서 더 외설적이 된 것은 아니다. 부디 오해는 말길 바란다. 



내 맘 깊이 간직하고 있어

자화상, 나의 고백



아끼는 친구가 언젠가 내게 작사가가 되면 어떻겠냐고 물은 적 있다. 그 말을 들은 지도 퍽 오래됐었는데, 여전히 가슴이 뛰었다.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제리 초와의 첫 만남을 술회할 때 밝혔듯 난 한때 음악을 만드는 일에 사력을 다했다. 그 자체를 사랑했고, 접어둔 뒤로 오랫동안 길을 잃었다. 이쯤에서 내가 아직껏 발매하지 못한 짧은 노랫말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설아를 생각하며 쓴 이 노래를 난 아이라 마리 앞에서 부르게 됐다. 하, 개탄할 일이다. 그것도 즉석에서 일본어로 바꿔서 불렀으니. 


어느 겨울

너 기대 오던 그 늦은 저녁

널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못했지만

맘 졸이던 새하얀 밤

그 모든 시간 동안

너는 내게 온 거야


 설아야, 네가 기대 온 것이 사실 한겨울은 아니었지. 네가 마침내 내게 기댄 날은 첫눈이 오는 초겨울이었다. 그날 하늘은 쪽빛 파도처럼 일렁였고 눈송이는 등대였다. 세상 만물이 다 내 편 같았다. 바람은 등 뒤에서 불었고 나뭇잎은 버티고 버티다 딱 하나 떨어졌다. 우린 죽어가는 이파리에 대고 사랑이 영원하길 빌었지. 그 모순은 이상하지 않았어. 우리 사이에 그어둔 의미 없는 선을 넘어 네 곁에 바싹 다가갔을 때 난 이미 너의 모든 마음을 알고 있었지. 넌 날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내가 맘 졸이고, 애태우고, 의심하고, 지난 상처가 두려워 널 사랑한다고 못 하던 모든 순간 넌 내게 왔던 거야. 내가 어떻게 잊겠니? 그날의 세상을 어떻게 내가 잊어버릴까.

 이런 마음이 담긴 노래를 아이라 마리 앞에서 부른 거야. 사실 저 노래를 쓸 당시에는 너와의 기억에 연관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 그런데 이제 와 다시 보니 결국 너와의 얘기더구나. 너와 나의 마음이 공평하게 공명했던 다시없을 사랑의 시작. 너도 잊지 않았겠지. 단지 아직 나보다 더 잘 살고 있을 뿐인 거지. 나도 언젠가는 공평하게 잘 살아가겠지.


 마리에게 노래를 불러준 건 그날 저녁의 일이다. 식당에서 호화로운 가이세키 식사를 마치고 마리는 한 바퀴 산책이나 하자고 했다. 탁구 클럽, 칵테일 바,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나는데 반대편에서 생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난 본능적으로 놀라 돌아봤다. 너무나도 낯익은 음악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리 초에서 들었던, 언젠가 연극의 이해 수업에서 알게 됐다는, 전언호라는 무명 가수의 ‘나무 아래에서’였다. 마리고 뭐고 없이 달려가는 중에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소리는 복도 끝 지하실 쪽에서 나던 것 같았다. 난 어느새 곁에 다가온 마리에게 지하실을 가리키며 뭐가 있냐고 물었다. 마리는 자기도 알 턱이 없다며, 가보겠냐고 했다.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 입구에서 불빛이 어스름하게 번지고 있었다. 난 숫제 모험심이 발동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람들 몇 명이 우리를 지나쳐 갔다. 마리는 무서웠는지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난 더욱 의욕이 솟았다. 멍청한 녀석, 왜 그랬을까?

 빛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니 방이 나타났다. 방은 수상할 정도로 넒은 가운데 피아노 한 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피아노는 상판이 반쯤 열려 있고, 방금까지 누가 친 듯 잔향이 남아 있었다. 난 조심스레 건반을 짚었다. 이상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어쿠스틱 피아노(업라이트 피아노)는 건반을 짚으면 본체 내의 해머가 타현(打絃)하며 소리를 낸다. 옅기는 하되 해머가 딸깍이며 현과 부딪치는 감각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피아노는 마치 키보드(디지털 피아노)처럼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가 났다.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만 다녀봤어도 알 수 있다. 키보드는 전기로 구동된다. 그럼 내가 치고 있는 이 피아노는 외양만 그럴싸하지 실은 전류가 흐르는 무선 디지털 피아노란 말인가.

 하지만 난 그 피아노를 더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어느새 긴장이 풀린 마리가 곁에 다가와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피아노 데이트 장면을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난 순해빠진 여느 남정네와 다르지 않아서, 둘뿐이 없는 커다란 방과 피아노 한 대에서 로맨스밖에는 떠올릴 게 없었다. 그녀는 내게 노래를 잘 하냐고 물었다. 뭐 어쩌겠나. 이런 데서라도 실력을 발휘해야지. 난 쑥스럽게 만류하다 거듭되는 요청에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듣다가, 일본어로 불러 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 난 내 노래가 '눈의 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니어도 좋으니 부탁한다고 했다. 그 꽃사슴 같은 눈망울. 난 머리를 짜내어 한 대목씩 바꿔 연주하기 시작했다. 집중하느라 딴 생각을 할 새가 없었다. 나 스스로도 언어 전환이 생각보다 빠른 것에 심취하여 한참 부르는데, 문득 기척이 스산했다. 난 불현듯 노래를 끊고 고개를 돌렸다. 어라? 방금까지 눈을 감고 듣고 있던 마리가 자리에 없었다. 아니, 방금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봐야 불과 몇십 초다. 난 급히 방 안을 돌아보았다. 마리는 온데간데없고, 분명 열려 있던 미닫이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난 불안한 직감에 달려가 문을 열려 했다. 문은 바깥에서 잠겨 있었다. 문은 철이었고, 그곳은 료칸의 외곽이었다. 지하실이라 네트워크가 될 리 만무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완벽한 고립이었다. 처음에는 그곳이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는 문이며, 마리도 그걸 모른 채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이겠지 생각했다. 다시 피아노로 돌아가서 불안하게 손을 놀렸다. 하지만 마리는 2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의심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온갖 잡념이 들었다. 흔하지도 않은 노래로 나를 여기로 이끌어 죽이려는 제리 초의 수작인가? 마리와 제리 초는 한 패인가? 그럼 난, 여기서 죽어야 하나? 근데 왜 나를 죽이는 거지? 친구는 벌써 죽은 건가? 대체 마리는 왜 나를 가둔 거지? 아이라 마리마저 실은 괴도라서 이렇게 날 농락하고 내 짐을 다 가져가려는 것인가? 내게 밝힌 신상 따위는 모두 조작인가? 그토록 치밀한 이브 켄달에게 속아 희희낙락했단 말이냐. 난 문을 크게 발로 차며 소리를 질렀다. 바깥은 고요했고 문은 견고했다. 주먹까지 썼다간 손마디가 아작날 것 같아 그만뒀다. 그제야 제대로 천장을 올려보니 과연 CCTV도 전무했다. 범죄의 온실이 따로 없었다. 두려웠다. 현기증이 났고, 가슴이 불타듯 뜨거웠다. 허리께마저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니, 냉정해야 한다. 상황이 열악할수록 침착해야 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방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불쑥 천장이 열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피아노를 밟고 올라갔다. 간신히 팔이 위에 닿았다. 아, 그 순간 얼마나 안도했는지, 다행히 천장의 사각형 틀을 열 수 있었다. 보통의 층 사이와 달리 천장 위는 배관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끝없는 어둠의 한가운데처럼, 내 몸통 부근을 감싸는 빛만이 그곳과 나 사이를 구획했다. 난 안간힘을 써서 위로 올라갔다. 그랬으면 안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랬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난 혹시나 떨어질까 걱정하며 틀만을 밟으며 움직였다. 암순응이 되자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참으로 이상했다. 마치 나의 마음 속처럼, 이것저것 꿈틀대는 듯하나 실은 텅 비어 있었다. 공허했다. 어디 등불이라도 하나 켜 주고 싶은 삭막함이었다. 그곳에 조금만 더 오래 있어도 자살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곳은 층과 층 사이의 연결구간이니 아까처럼 한 번 더 올라가면 위층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범엔 천장이 콘크리트겠지만 달리 희망이 없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데, 갑자기 아래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고 무서웠다. 누군가 피아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느릿하고 가벼운 발소리. 마리의 것은 아닌 듯했다. 두 사람 같기도 했다. 약간의 웅성임이 들렸던 것이다. 난 소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숨죽여 기다렸다. 그중 한 사람이 피아노 앞에 다다라 본체의 반쯤 열린 뚜껑을 아예 덮었다. 아니, 아예 여는 것도 같았다. 끼익, 조금 있으니 의자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난 낮은 포복으로 내가 올라왔던 사각형 틀에 다가가고 있었다. 첫 마디가 들리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열린 사각형을 향해 달려갔고, 발을 헛디뎠고, 넘어지면서 천장이 크게 흔들리자 사각형 두어 개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내 몸은 틀을 배에 끼고 한 바퀴 돌며 그대로, 역시나 아예 뚜껑을 열어 둔 피아노의 본체 안에 빠져 즉각 의식을 잃었다.


 그 노래, 누군가 연주하기 시작한 그 소름끼치는 멜로디는, 다름 아닌 '나무 아래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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