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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Aug 05. 2024

시절의 인사

그래 그랬었지

성시경, 넌 감동이었어



 그랬지. 그 시절은 장마처럼 소란했다. 설아야. 네 결혼 소식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생각은 넘치거나 모자랐고 결론에 이르는 일은 없었다. 난 괴로웠다. 형을 만나러 동백섬에 갔다. 작년에 심은 찔레꽃이 곱게 자라 있었다. 형을 짓누르는 흙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보다는 적기를 기도했다.

 난 내 장지를 생각해본 일이 없다. 하지만 형은 사후 계획이 명료했다. 형은 생처럼 사를 대했고 사를 생의 가능세계라 믿었다. 잔명(殘命)을 깨닫고도 형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요컨대 형은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형은 내 우상이었다. 나보다 7살 위인 형은 내가 한글을 깨칠 무렵 이미 동네에서 내로라하는 천재였다. 형은 여덟 살에 위인전을 썼고, 열한 살에는 소설을 썼으며, 자기 전이면 그걸 읽어줬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좋다는 건 느꼈다. 나였으면 정말 기쁠 것 같은 많은 순간들을 두고 형은 괴로워했다. 난 형이 시험을 보고 돌아오는 날이 싫었다. 형은 안방 화장대 위에 성적표를 올려놓고 거실에서 무심하게 책을 읽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공부는 쉽지 않았다. 한창 사춘기를 겪던 어느 날, 형은 수능을 봤다. 그날도 똑같았다. 조용히 성적표를 화장대에 올려놓고 거실에서 책을 읽었다. 난 형 몰래 성적표를 훔쳐봤다. 예상대로 죄다 1등급이었다. 난 형에게 질투가 난다고 말했는데, 형은 1등이 아니잖아, 라며 씁쓸해했다. 그땐 그 표정과 말투, 모든 게 너무 미웠다.

 형에게 시험 끝난 날은 친구들과 싸도는 날이 아니었다. 추리 소설을 읽는 날이었다. 그러다 내가 다가가면 형은 강아지에게 장난치듯 내 코를 잡아당겼다. 형은 죽던 날, 팔을 간신히 들어올리며 똑같은 동작을 하려 했다. 난 허리를 굽혀 형의 손에 코를 대고 울었다.

 형은 보란 듯이 명문 대학에 입학했다. 형은 국문과, 사회학과, 경제학과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부모님은 국문과에 가기를 권하셨다. 우리는 형을 알았다. 형은 가능한 열린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형은 그때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뜻에 따랐다.

 형은 강의에 잘 나가지 않았다. 전화할 때마다 항상 술을 마시고 있다고 했다. 난 형도 인간적인 면이 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첫 학기, 형은 최우등상을 받았다. 그쯤 되니 짜증내는 것도 지쳤다. 형은 자기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널렸다며 겸양을 떨었다.

 솔직히 형은 미남은 아니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아마 작정하고 관리했다면 인기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형은 외모 관리를 잘 안 했다. 그래놓고는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는 없다면서 징징거렸다. 하지만 결국 형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과 결혼할 뻔했다.

 형이 누나를 처음 본 건 대학교 4학년 때라고 한다. 도서관에서 다른 남자와 있는 걸 봤다나. 당시 형은 긴 방황을 끝내고 돌아와 공부하고 있었다. 형의 방황은 다채로웠으니, 그 정신으로 학교를 자퇴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심지어 신부님이 될 생각까지 하다 돌아온 형은 갑자기 외무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만에 합격했다. 난 대학에 들어가서 형과 함께 살고 있었고, 결과를 대신 확인해줬다. 그 후 한 달 동안 내 마음도 줏대없이 들뜨곤 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듬해 봄, 형은 연수를 마치자마자 누나에게 청혼했다. 누가 푼수 아니랄까 봐, 말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다 결국 편지를 썼다는데, 나중에 누나가 그 내용을 보여줬다.  



이르게 핀 목련이 끝내 봄을 일으키듯이

난 지는 동안에도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김진환, 연애 편지



 설아야, 너를 생각하며 시를 쓴 것도 사실 우리 형에게서 배운 바야. 넌 내가 형이 있었는지도 몰랐겠지만. 글쎄, 어찌됐건 슬픈 이야기, 말하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단다. 나의 최후의 보루였다고 한다면 믿어주겠니?

 내게 형이란 한때는 눈엣가시였고 나중에는 안쓰러운 인간이었다. 형은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었고, 성패에 대한 집착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심성이 여려서 남들보다 몇 배 두꺼운 가면을 썼으며, 욕심도 많고 포기를 몰랐지만 그걸 따라 줄 체력이 부족했다. 형은 감정의 명암을 회색지대처럼 다뤘다. 그건 꾸며진 의연함이었다. 죽는 날까지 형은 편안함을 몰랐을 것 같다. 형은 쉬면서도 쉬는 걸 몰랐다. 우리 가족과 누나는 그런 모습을 고쳐 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형은 죽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나라로 가겠다며 케냐로 떠난 지 1년도 채 안 돼서, 결혼식이 두 달 남은 시점, 형은 의식을 잃은 채 고국으로 송환됐다. 누나가 일 때문에 잠시 귀국해 있던 몇 주 새였다. 형이 발견된 곳은 어느 대평원의 기찻길 인근이었다. 육하원칙에 맞는 건 거의 없었다. 왜, 어떻게, 무얼 하다······? 형에게는 몽유병도 없었고, 기타 질환도 특별히 없었다. 타격의 흔적마저 없었다. 의사는 쇼크성 저혈압으로 인한 심장 마비라고 했다. 그것 치고는 숨이 떨어지지 않고 있어서 이례적이라고도 했다.

 나, 부모님, 누나, 형과 누나의 친구들이 번갈아 형의 곁을 지켰다. 다들 참 많이 울었다. 나는 형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잤다. 이렇게 주변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체 왜 일어나지 않는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의 심장 박동이 갑자기 굵어졌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난 다급히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구랄 것 없이 다들 달려왔다. 조금 지나 깨어난 형은 눈만 간신히 뜬 채 유언을 남겼다. 안간힘을 써서 나를 끌어안고 코를 잡아당겼다. 형은 모두에게 말했다. 마지막 심장 소리를 들어달라고. 우리는 형의 심장 부근에 귀를 기울이고, 형의 숨이 꺼져가는 소리를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형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배경은 나중에 엄마와 누나에게 듣게 되었다. 형은 일찍이 너무 허약해 예상 수명이 남들보다 적었다고 한다. 단지 형이 내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을 뿐. 누나와 연애할 때도, 엄마는 누나를 불러 형의 몸이 쇠약하니 누나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 사과했단다. 누나는 그럼에도 형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고, 지금도 친딸처럼 우리 부모님을 모신다.

 물론 그렇다 쳐도 형의 죽음은 너무 일렀다. 이 모든 사연을 듣고서 내가 느낀 배신감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다들 힘들었다. 어리광을 피울 순 없었다. 아빠는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생사는 하나의 피상에 불과하다고. 진정한 남자라면 언제나 어디에서나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는 법, 형도 항상 우리 곁을 지키고 있을 테니 슬퍼하지 말자고. 정작 그렇게 말하고는 사람들이 모두 떠난 새벽, 아빠는 형이 몰래 피우던 담배를 국화 옆에 놓고 한참을 흐느꼈다. 아빠의 떨리는 어깨, 엄마의 지친 얼굴, 누나의 볼에 흐르던 눈물과 내 터질 듯한 가슴의 감각을 난 아마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그다지 몸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얼마나 길게 살지는 모르겠다만.

 설아야, 그로부터 1년 뒤, 나 역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됐지. 그게 바로 너야. 오랜만에 형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마침내 너의 결혼에 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김동률,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그래, 네가 좋아하던 노래. 좋아하던 식당. 우리가 한 번쯤 같이 읽고 싶던 시집. 그 사이로 드리우던 아몬드나무. 네가 없이도 난 그것들을 듣고 보고 읽는다. 우리가 한 번쯤 같이 보려던 개화. 내게 그런 사람이 또 생길 줄은 몰랐다. 너란 사람은 원래 없던 것처럼 꽃잎을 매만지고 봄내음을 느끼고 누군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그녀가 안겨오기라도 하면 그제야 덜컥, 내 마음이 아직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차렸지.

 하지만 너의 걱정을 덜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난 너를 잊어가고 있었단다. 참 신기한 일이야. 네 생각이 잘 안 나게 됐는데, 오히려 주변에서는 이제 제발 널 떨쳐내래. 정작 널 그리워할 때는 그렇게 안 믿더니. 모르겠어. 원래 내연은 외연과 달리 되기도 하는 건가. 물론 그럼에도 결혼 소식은 충격이었지. 처음엔 너의 마음에 관한 많은 착각이 허사였다는 게 슬펐어. 네가 나를 안쓰러워하는 것 같았고, 과거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았어. 그 모두는 솔직히 비참했지. 하지만 이런 생각이 따라들더라. 네가 결혼했다는 사실로 너의 마지막 편지가 무용해지는 건 아니라고. 거짓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어쩌면 거기에만은 너도 진실을 말한 것 같다고. 서로를 속이지 않는 마지막 편지를 통해 넌 자유로워졌으니, 나 또한 이 글을 끝까지 써야만 하는 거야. 우리 형이 누나에게 쓴 연애 편지처럼 솔직한 글을 쓰고 싶구나.

 설아야, 그러하매 너를 축복한다. 우리를 한번쯤 같이 있게 하던 사랑을 위해서, 혹은 우리를 헤매게 하던 이별을 위해서, 난 네 생활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란다. 가끔은 나를 생각하되 네 곁의 사람에게 그걸 이야기하고 위로받을 수 있길 바란다. 이것이 너의 결혼 소식을 들은 내가 이제부터 글의 끝까지 가져갈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어쩌다 보니 내 비밀들을 가감없이 누설하고 있으나 걱정하지 마라. 삼가 말하거니와 이 글은 주소지 불명의 반송 우편이 될 테니 그대들이 읽어도 무리가 없다. 혹여나 주소를 찾으려고만 하지 마라. 따지고 보면 사랑과 죽음은 만인의 가장 포괄적인 공통분모 아닌가? 비밀리여서 그렇지, 그대들 사랑의 일기장도 만만치 않다. 형에 대한 위로는 접어두고, 남의 연애사 훔쳐보는 기분이래도 좋으니 부디 흥미롭게 읽기를 바란다. 가랑비 내리는 여유로운 오후에 카페 창가에서 읽어도 좋겠다. 같은 시각 정반대 계절에, 함박눈 쌓인 처마 아래에서 읽어도······. 다 읽고 내게 편지를 보내준다면 좋겠다. 아, 생각만 해도 흐뭇하구나!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속의 마종기와 루시드 폴이 그랬을까? 그들처럼 우리도 서로를 알고 있다면 좋겠는데. 글쎄, 적어도 이 글에 독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겠지.   



괜히 눈물 나올 것만큼 아름답던 하루

베란다 프로젝트, Good Bye



 형의 입관을 마치고 나오는 길, 장례식장 앞에 참새가 한 마리 죽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형이 참새 수십 마리로 흩어지는 꿈을 꾸었다. 참새들은 한참을 무리지어 날아가다 한 마리 불사조로 변했다. 그가 돌아오는 자리마다 찬연한 노을이 비꼈다. 불사조는 커다란 날개를 열어 나를 껴안았다. 난 살이 타는 고통을 느끼며 힘껏 마주 안았다. 그는 내 그을은 어깨에 눈물을 떨궜다. 너무 차가워서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나 보니, 난 형의 영정 앞에서 졸고 있었다. 어느새 향은 재가 되었다. 난 행여 그 잿더미에서 형이 다시 살아나진 않을까 한참을 바라보았다. 우리 형은 언제나 기적처럼 나를 놀래켰으니까. 하지만 형은 사진 속에서 멋쩍게 웃고만 있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라 마리와 함께 간 조잔케이에서 형을 만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 김에 형과의 추억을 실어보았다.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양해를 구한다.



도라지꽃에 서리가 내린 밤

전언호, 행선지



 사랑하는 형, 험하디험한 세상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 내가 얼마나 형을 불렀는지 다 알아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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