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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Jul 31. 2024

기록관의 전서

이 밤을 넘으면 우린 여름으로 간다

전언호, 청춘의 음악들



 설아야, 일교차가 크니 겉옷을 챙겨 다니기 바란다. 여하간에 시간은 가는구나. 난 언제쯤 아무런 회한 없이 한 계절을 마칠 수 있을까? 여기는 여름의 문턱, 내 마음엔 아직 눈이 내린다.


 어김없이 몇 글자 너에 관한 마디를 얹는 것으로 여행 기록을 미룬다. 실은 가면 갈수록 왜 네가 내 감각의 비망록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너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처지인지도 모르겠다. 네가 날 궁금해할 하등의 이유도 없는데다, 심지어 우린 헤어졌으니 말야. 초라한 일병 시절, 네가 어떻게 부대 주소를 알고 소포를 보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왜 아팠던 시간까지 행복했다고 말했는지, 만일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 아픈 짓들을 똑같이 해낼 것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다. 네 마음을 몰라도, 혹시 네가 읽지 않는대도 난 계속 쓸 것이다. 적어도 도서관이 쉬는 첫째, 셋째 주 금요일에는 쓸 것이다. 도서관이 쉬는 날에는 네가 그리워지니까.



우리는 혼자만이 혼자만큼의 서로를 잊게 될 것입니다

이병률, 이별의 원심력



 친구는 제리 초를 만나러 갔다는 게 떠오르고, 연달아 한 가지를 더 기억해낼 수 있었다. 쌍둥이 동생이 오타루에서 데스페라(Despera)라는 바를 운영하고 있다는 제리 초의 언질. 당시에는 크게 관심하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곳에 찾아가는 일밖에 희망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에 젖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꽤나 무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눈이 소슬하게 내리고 있었다. 난 발걸음을 재촉해 제리 초의 쌍둥이 동생에게로 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나지막한 색소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깜깜하고 좁은 골목에 DESPERA라 적힌 흰 간판이 빛나고 있었다. 전날 지하에서 본 것과 같은 암갈색 문은 무릎까지 오는 눈더미 사이에서 간신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낮은 천장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음악 소리는 또 어찌나 큰지. 그곳에 몇 시간만 있어도 신체 연령이 곱절은 늘 것 같았다. 몹시 어두운 가운데 등불이 희미하게 중심가를 비추고 있었다. 가게는 전날의 제리 초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았다. 난 무언가를 사부작거리고 있는 주인에게 다가갔다. 말을 걸려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난 너무 놀라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가게 오른편 구석에서, 그토록 찾던 친구 녀석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상상해보라. 두꺼운 암갈색 문을 열면, 14평 정도 되는 어두운 가게에 펜던트가 사실상 유일한 빛을 뿌린다. 빛은 중심가를 휘도는 연무에 묻혀 자욱하다. 창문은 단 한 개도 없어 찌든내가 나는데다, 저기 50미터 밖에서까지 들리는 육중한 색소폰 소리가 귀를 때린다. 난 그렇게 시끄러운 'Take Five'는 들어본 일이 없다. 점입가경, 포화 속으로 들어가니 난데없이 친구가 나타난다. 하루종일 나를 괴롭힌 그 녀석의 존재가 저 어둠의 변두리에서 너무나 허무하고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도 웃음을 흘리며 손을 흔드는 모양새로. 나는 화낼 여력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제리 초와 똑 닮은 주인과 몹쓸 친구 녀석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친구에게 다가갔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로 길고 장황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잘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라, 각색 없이 약간을 옮겨 둔다. 무슨 정신이 있었겠냐만, 그래서 더 선연히 기억나는 것도 사실이다.



 ······나도 이렇게 황당무계한 일을 말하고 있다는 게 도통 믿기지 않네. 하지만 난 곧 다시 떠나야 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내딛었어. 그 노망 난 할아범의 말에 홀려서 말이야. 누구냐고? 누구겠어. 망할 제리 초지.

 오늘 아침 내가 산책 겸 제리 초를 만나러 갔을 때, 그곳은 이미 몰라보게 변해 있었네. 자네도 한 번 들렀지? 웬 카바레가 들어서 있었겠지. 놀라지 말게. 그건 제리 초 할아범이 밤새 만들어낸 또 하나의 제리 초라네. 그럼 그 많은 LP판과, 뭐, 기타 등등, 다 어디로 갔냐고? 어디로 갔겠어. 한 곳에 몰아놓고 암막 커튼을 친 거지. 왜 그렇게 하냐고? 우리가 다시는 그를 찾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었던 거야. 왜 그렇게까지 하냐 싶겠지만, 방랑자의 뜻을 우리가 어찌 끝까지나 알까. 이해하지 말면 그만인 것을.

 아무튼간에 하다 만 삐에로 분장의 제리 초를 난 알아봤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도 날 못 속인 걸 깨닫더군. 꼽추등 모형을 등에서 꺼내 내던지며 씩씩대는 모양새가 어찌나 사납던지. 그는 이내 내게 다가와 자기를 본 이상 좀 도와줘야겠다고 말했네. 난 그럴 이유가 없잖아. 자네에게 말을 못했으니 처지가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날 위협했네. 늙은이 악력이 뭐 그리 센지, 내 오른손목을 붙들고 도통 놔 주질 않았어. 난 자네에게 전화할 심산으로 휴대폰을 꺼냈는데, 그 순간, 그는 휴대폰 끝에 매달려 있던 와이파이 공유기를 가로채 바닥에 쾅 내리쳤네. 사방으로 부품이 튀더군. 난 알다시피 겁이 많고, 그런 류의 거친 협박은 난생 처음이었네. 그래서 그만 압박감에 못 이겨 울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네. 이쯤에서 묻겠지? 왜 노인에게서 빠져나가 신고한다거나 하는 소시민다운 일은 하지 못했냐고. 이를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자네에게 말 못한 나만의 고민을 토로해야겠네.

 내가 사서가 된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네. 다른 많은 직장을 마다하고 사서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자네에게 말한 적 있다시피, 이 세상의 모든 저작을 전서화(全書化)한다는 욕망이 다른 무엇보다 컸기 때문이네. 그러기 위해서는 책들의 품 속에서 살아야 했고, 이 지상 여섯 곳의 대도서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어야 했네. 여섯 곳의 비밀 기록관. 그중 네 곳은 다행히 알려져 있지. 오스트리아 멜크의 수도원 장서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대학 도서관, 그리고 미국 의회도서관의 비밀 서고. 하지만 지리학자들과 서관원들이 아직껏 찾아내지 못한 두 곳이 있다네. 그 둘에 대한 소문들을 모아 보면, 한 곳은 적도 가까이, 비가 그치지 않는 곳, 동물이 사람보다 우월하고, 사람보다 작은 식물이 없다시피 한 곳. 아일랜드 사람 말마따나 바람이 방벽으로 강어귀 바위를 두드리며 무서운 기세로 강바닥을 갈아엎는다는 곳, 율리시스의 암호를 풀어야만 열 수 있는 다섯 개의 문, 잃어버린 세계. 지리학자들은 이 기록관을 아마존 어딘가로 추정하고 있네. 그렇게 습한 곳에 어떻게 도서관이 있냐고? 있을 수 있지. 책이 반드시 종이로 덮여 있으리란 보장은 없잖나. 그래, 많은 탐험가들은 그 비밀 기록관의 책들이 금으로 제본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네. 그렇게 아마존을 찾아간 이들 모두가 불행히도 돌아오지 못했지. 그곳이 실제로 있을지는 어떻게 아냐고? 모르네. 하지만 진정한 앎이란, 에코가 주지했듯, 알 수 있는 것, 알아서는 안 되는 것, 알 수도 있었던 것을 포괄하는 앎이지 않겠는가? 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갔을 때 이 일명 ‘아마존 디아스포라’와 유사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네. 여섯 개의 대도서관에 대한 불가사의를 담은 아랍 사람의 책이 있는데, 다섯 번째 도서관에 관해 여름, 미지, 강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더군. 전문을 들을 필요까지는 없네. 지금 급한 건 이게 아니니까.

 그래, 본론을 얘기해야겠지.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한 곳에 대해 그 책은 이렇게 적고 있네.


 지평선은 흰데 난 무역풍 속에 있네

 부른다고 잡을 수 있다면 삶은 바람

 육 개월의 겨울 육 년마다의 저주

 여섯 개의 문 여섯 마리의 일각수(一角獸)

 여섯 사람의 피로 쓰는 비밀의 끝

 여행자여, 답은 눈 속에 있을진저


 일종의 예언 같지. 뭔가 떠오르지 않나? 그래, 비에이. 그간은 전혀 감을 못 잡았는데, 우리가 여행하던 불과 며칠 사이 너무 많은 단서가 나왔잖아. 난 자네가 눈보라 편지를 발견하고 내용을 일러 줬을 때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는지 모르네. 자네가 심란해하는 것 같아서, 마음을 더 불편하게 할 이유는 없으니 별 말 안했을 뿐. 내가 신났다고는 하지만 실은 추정일 뿐이잖아. 위험하기도 하고. 자네 여행까지 그럴 이유는 없을 테지. 하지만 이튿날 제리 초가 무역풍이란 산장을 알려주고 답은 눈 속에서 찾으라고 했을 때, 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일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네. 비에이의 비밀 도서관, 일컨대 ‘바람의 미술관’이란 헛말이 아니고, 제리 초는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 졸고 있지 않았냐고? 일종의 눈속임이지. 그리고 아침에 급하게 찾아간 거야.

 제리 초의 통찰안도 보통이 아니더군. 내가 소리를 지르며 울자 표정을 바꾸더니, 무언가 찾고 있는 게 있지 않냐더라. 제대로 조는 척하려면 귀를 쫑긋거려서는 안 된다며 말야. 그 노인네는 자기가 함께 가 줄 테니, 우선 도와달라고 거의 사정하듯 말했네. 나도 별 수가 없잖는가. 정말 별 수가 없었던 거야. 하늘도 무심하지, 이건 솔직히 기회였다고.

 난 제리 초를 도와 급히 방을 정리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네. 자네를 속여서 미안하네. 오늘 아침 자네가 본 꼽추와 키다리는 제리 초와 나야. 알아보지 못하더군. 자네가 어떤 말로 욕하든 할 말이 없네. 하지만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살짝 안도한 것도 사실이야.  

 연락하지 못한 것 또한 진심으로 미안하네. 공유기가 박살난 와중에, 여기까지 오는 어느 곳에서도 와이파이를 잡지 못했어. 제리 초는 호기롭게 자네를 속인 뒤, 당장 떠나야 한다고 채근했네. 예언의 저주가 올해인 것은 확실하나 육 개월의 겨울이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는 것이 이유였어. 난 제리 초가 모는 1톤 트럭을 타고 가던 중 이곳 데스페라를 떠올렸네. 현명한 자네라면 날 찾으러 여기 올 것 같았어. 그는 한사코 거절하다 차마 도리가 아니었다 여겼는지 내 말을 들어줬네. 실은 그의 알리바이인지도 몰라. 내가 자기를 찾아올 줄 알고, 또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일부러 데스페라를 말해둔 거지.

  왜 자네를 두고 몰래 가려 했는지 묻는다면, 가장 큰 이유를 말하겠네. 아마존의 비밀을 찾아간 이들은 모두 죽었네. 비에이에서는 사람이 사라지고 있어. 예언이 맞다면, 아마 눈보라 편지는 진실일 거야. 아무리 자네가 모험심이 강하다 한들, 난 자네의 목숨까지 이 빌어먹을 여정에 연루시키고 싶지 않네. 차라리 내가 적어 둔 제리 초와의 대화와, 그 눈보라 편지를 무사히 가져가서 기록으로 남겨주게. 내가 자네를 하루이틀 본 게 아니지 않은가. 자네는 글 솜씨가 탁월해. 그것 외에도 가지고 있는 재능이 너무나 많지. 무사히 돌아가 삶에서 자네가 꿈꾸는 일들을 이루게.

 아, 왜 이곳 데스페라를 말한 게 제리 초의 알리바이냐고? 저기 주인장을 잘 보게. 아, 이 약삭빠른 노인. 이미 도망갔군. 약속 장소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자네가 얼핏 본 주인장은 제리 초의 쌍둥이 동생이 아니네. 이 또한 거짓일지도 모르지만, 제리 초는 형제가 없어. 늙은 방랑자에게 무슨 형제. 자네가 방금 본 사람은 제리 초야.


김진훈, 가진 자와 잃은 자



 난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어나 가게를 한 바퀴 돌았지만, 주인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쑥 소름이 끼쳤다. 친구에게 배신감이 들었고,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난 그에게 실망하는 한편, 그를 구슬릴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친구는 확고했고, 말한 대로가 사실이라면 내가 그에게 행할 수 있는 마지막 선(善)은 배려였다. 난 친구가 천천히 일어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날 포옹하려 들었다. 난 지극히 인간적인 모순을 느끼며 그를 마주 안았다. 친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난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고 했지만, 이것이 친구를 보는 마지막일까 두려워졌다. 문 밖으로 나서는 친구를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친구는 미소를 흘리며 어두운 눈길 속으로 떠났다. 난 온몸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문이 닫히고, 등불이 머리 위로 일렁거렸다. 담배를 꺼내물었다. 연기는 펜던트의 중심부를 나직이 선회했다. 'Take Five'가 든 데이브 브루벡 콰르텟 앨범의 마지막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쯤 되니 내 곁에 설아가 없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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