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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Jul 29. 2024

사랑이 많은 세상

고마웠다고 미워도 했다고

정미조, 다음 생엔 그냥 스쳐 가기만 해요



 이튿날 눈을 떠 보니, 친구는 방에 없었다. 산책을 나갔겠거니 생각하며 슬그머니 창밖을 내다봤다. 얇게 휘날리는 눈발 사이로 빗금 긋는 햇살. 간밤의 여운이 아직 자욱한 거리에 한 소녀가 잰걸음치고 있었다. 꽉 껴안은 장바구니로 보아 막 마트에 다녀오는 길인 듯했다. 어머니의 심부름인지, 소녀 가장인지, 잘 모르겠지만 참 씩씩해 보였다. 뒤로는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걷고 있었다. 왠지 익숙한 풍경, 난 웃음을 참으며 뒤돌아 커피 포트를 찾았다.

 숨가쁜 세상에서 난 가끔 물을 끓인다. 설탕을 반 뺀 믹스커피를 들고, 침대에 앉아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나만의 작은 방에서 시간이 초 단위로 흐르는 3분 간의 휴식. 겨울엔 가끔 차가운 커피를 마시고 싶고, 여름엔 종종 뜨거운 커피가 당긴다. 같이 마실 사람이 없을 때 주로 그렇게 때운다.

 친구가 전화를 받지 않아 그의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공유기를 친구가 가져간 터라 난 달리 갈 곳이 없었다. 로비에서 꿈뻑꿈뻑 졸며 기다렸지만, 한 시간이 되도록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오타루행 해안열차는 12시 15분. 난 어쩔 수 없이 친구의 짐을 호텔에 맡겨두고 역으로 향했다.

 가는 중간에 호기심이 생겨 '제리 초'가 있는 지하에 들어갔다. 웬걸, 전날 깔끔했던 암갈색 문에 웬 삼류 클럽 포스터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피아노와 그 많던 LP들과 생맥주 제조기는 온데간데없고 휑한 무대에서 웬 삐에로 분장을 한 꼽추가 탭댄스를 연습하고 있었다. 옆에서 같은 분장을 한 키다리가 박수를 치다 해벌쭉하게 날 쳐다봤다. 난 황급히 문을 닫았다가, 용기를 내어 다시 열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원래 여기는 카바레이며, 제리 초라니 꽤 알려진 이름이지만 만난 적은 없다고 했다. 지도를 열어 보니 GPS상에도 정말 나이트클럽 주소가 찍혀 있었다. 몹시 요상한 일이었다. 난 더 알아볼까 하다가 기차 시간에 쫓겨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섰다. 불 꺼진 지하가 음산한 데다, 어딘가 소름이 끼쳐 도망치듯 뛰어올라갔다.

 삿포로발 오타루행 열차는 활처럼 굽은 해안선을 따라간다. 무사히 탑승한 난 두 가지 의문을 안고 창가에 기댔다. 친구는 어디에 있고, '제리 초'는 대체 뭘까? 바다 건너편으로 비에이 산이 보였다. 이제는 실종 사건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눈보라 편지'도 떠올랐다.

 부서지는 파도처럼 마음이 시렸다. 해안선은 아름다웠고, 열차 안을 메우는 사람들의 작은 웃음소리가 슬펐다. 난 귀를 기울여 파도 소리를 들었다. 창이 소리를 가로막으면 소리는 파도가 입을 벌리는 순간으로 되돌아갔다. 소리는 보임으로써 내게 들렸다. 끝없이 들려 나의 가슴 속을 시리도록 헤집었다.


 오타루 시의 내역(內域)은 기대 이상으로 컸다. 생 제르맹 빵집에서 갓 구운 바게트 냄새가 퍼져나왔다. 단팥빵 하나를 사들고 호텔로 갔다. 걸어가는 동안 눈이 그쳤다.



나쁜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요

브로콜리너마저,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닐 뿐. 하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설아야. 나는 좋은 사람이었니? 너를 참 많이 울렸으니, 나쁜 사람인 걸까.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면 답을 구했겠지. 적어도 나보다는 후련하겠지.

 '카페 워크스'에 갔다. 카카오와 체리 향이 뒤섞인 커피를 마셨다. 엊그제 산 담배는 그새 다 떨어졌다. 마지막 한 대를 입에 물고 빈 곽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불 꺼진 화롯가 주위로 숯검정이 흩날리고 있었다. 어머니께 드릴 커피콩을 샀다. 친구는 여전히 기별이 없었다.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마음이 편치 않아서, 난 시야 심도를 100mm로 조정했다. 하나씩,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천천히 깊게 바라보기로 했다. 신나게 수다를 놓던 한 무리의 소녀들과, 눈으로 말하기 게임을 하는 연인(남자의 눈은 온 힘을 다해 지루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메뉴판을 한참 쳐다보다 결국 주인에게 설명을 부탁하는 뿔테 안경 노부인이 다녀갔다. 난 카페 한가운데 앉아 있었는데, 주위의 회전율이 너무 빨라 점점 그 자리가 부담됐다. 귀여운 미키 마우스 그림이 있는 구석으로 옮겨 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소일하는데, 갑자기 어떤 일본인이 다가왔다. 그녀는 내게 혹시 찾는 것이 있냐고 물었다. 난 쑥스럽게 고개를 내저으며, 그냥 심심해서 두리번대던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혼자 왔냐고 묻더니, 자연스레 맞은편에 앉았다. '아이라 마리'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였는데, 솔직히 너무 예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릿쿄 대학 문학부 3학년으로, 작가 지망생이었다. 여행 차 오타루에 와서 소재를 찾으려 이곳저곳 말을 붙이고 있었다는데, 아마 사이비 광고 차 왔더라도 대화는 나눴을 것이다. 렘브란트와 피그말리온에게 감사를, 그녀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미술관에서 뛰쳐나왔대도 믿을 정도였다. 설아에게 보내는 편지랍시고 시작한 글이 이런 호색한 표현에 이르다니, 하지만 설아를 처음 봤을 때를 넘어설 요동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 괜찮다.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이런 별난 일들은 여행 끝까지 따라붙었으니 놀랄 것 없다. 난 비록 일천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로부터 주워들은 일본 문학에 대한 지식을 그러모아 대화에 임했다. 몇 마디를 여기 옮겨본다. 기자인 내 친구가 언젠가 윤동주는 연세대보다 릿쿄 대학에서 더 오래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 이렇게 쓰이는 것으로 보아, 역시 식자들의 말은 들어둘 필요가 있다.



마리: ······동주의 시는 일본에서도 꽤 알려져 있어요. 윗분들 의견과는 별개로, 일본의 젊은 작가들 가운데 동족상잔을 직시하려는 움직임도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국문학부이기는 하지만, 저는 주로 릴케나 메리 올리버 같은 외국 시인들의 시를 공부하고 있어요.

나: 메리 올리버는 처음 듣네요. 릴케는 윤동주의 시에도 나올 텐데요.

마리: 시를 좋아하시나요?

나: 좋아한다기보단 강제로 배웠죠. 한국에서 대학을 가려면 시 공부는 필수여서요. '참회록'이라는 시는 압니다.

마리: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나: 만 이십사 년을 어떻게 살아왔던가?

마리: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일 거예요.

나: 멋진 시입니다.

마리: 가을학기에 한국으로 유학을 가는데, 연세대학교에 꼭 가봐야겠어요. 윤동주 기념관이 해있대요. 저희 학교에도 있긴 하지만, 느낌이 다를 것 같아요. 아, 어느 대학에서 공부하시나요?

나: 저는 카이스트라는 곳에서 대학원 다녀요. 심리학 전공이에요.

마리: 그렇군요. 저는 고려대학교로 가요. 독문과에 릴케 연구로 엄청 저명한 분이 계셔서 밑에서 배우기로 했어요. 릴케 시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레 한국 시도 읽게 돼요. 윤동주도 있고, 백석이나 박목월 같은 시인들의 시를 읽다 보면 어딘가 마음이 편안해지고 밤은 아름다워져요.

나: 고려대······. 좋은 학교죠. 시를 사랑하시는군요.

마리: 시, 소설, 영화가 있다면 아무리 좁고 거친 방이라도 살 수 있어요. 이 세상 도처에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멋지지 않나요?

나: "장미의 이름"이네요.

마리: 맞아요. 책을 좋아하시나 봐요. 아니라고는 하시지만 시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나: 워낙 알려진 말이라서요. 물론 한때는 곧잘 낭만에 젖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아니게 된 것 같네요.

마리: 낭만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낭만은 사랑이잖아요.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그리운 마음도, 아름다운 마음도 잦아들기야 하겠지만, 언제든 다시 뛸 수 있죠.

나: 작가라면 어떤 걸 쓰고 있나요? 이런 질문 많이 받을 테지만.

마리: 네. 아직 지망생이긴 한데, 그런 질문 받는 거 좋아해요. 사랑이 많은 세상에 대해 쓰고 있어요. 아, 사랑을 사물로 정의하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나: 글쎄요. 당장은 떠오르는 게 없는데······.

마리: 지금 한 번 생각해보실래요? 대신 떠오르면 바로 말해주셔야 해요.

나: ······카메라?

마리: 오! 왜 그렇죠?

나: 순간을 영원으로 데려가니까요. 제가 한 말은 아니에요. 카르티에 브레송이라는 사진사의 말입니다.

마리: 와. 낭만적이네요. 사랑은 사진처럼 영원하다. 좋은 말이네요.

나: 마리 씨 소설에 등장하게 될까요?

마리: 네, 나중에 완성하면 보여드릴게요.


김진훈, 여인 아이라 마리



 어쩌다 보니 내가 먼저 마리를 등장시켰지만, 마리가 쓴다는 건 소설이니까 이보다 훨씬 멋지겠지. 그녀와의 짧은 만남을 기록하는 것으로 난 아이라 마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사진도 일종의 기록이구나. 순간을 영원화하는 모든 기록은 사랑에 귀속된다.

 마리와 노변정담(爐邊情談)을 나누는 동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마리 덕분에 어수선한 오후를 녹일 수 있었다. 세 가지 실종 사건-친구, 눈보라 편지, 제리 초-을 잠시나마 잊었다. 마리는 잘 있을까? 이메일조차 교환하지 못했다. 그래, 언젠가 그녀의 소설은 세상에 나올 테니, 살다 보면 자연스레 이름을 듣게 되겠지. 그녀는 틀림없이 나와의 만남을 상상으로 곱게 버무릴 것이다. 그 소설을 읽는 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잘 살고 있을까, 아니, 살아는 있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행복해야 할 텐데.

 설아야, 아이라 마리는 나보다는 너와 더 잘 어울리는 친구인 것 같아. 난 차마 내가 한때 사랑한 사람도 일문학을 공부했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어. 내 짧은 지식의 출처 또한 대부분 너에게서 왔다는 건 불문가지. 우린 알고 있었지. 실은 사랑이란 단어나 단문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의 내용은 성경책만큼 길고 두텁다. 난 사랑이 겨울 나무를 잔가지부터 뿌리까지 채우는 물이라고 어렴풋이 믿어. 그 물은 마리와 함께 있는 두 시간 내내 나무의 이곳저곳을 타고 돌았고, 물이란 곧 너였어.

 난 아이라 마리와 함께 시립 오타루 문학관을 지나쳐 운하에 갔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그쯤에서 마리와 헤어져 혼자 저녁을 먹었다. 옆 사람의 새우 껍질 질겅이는 소리가 식사 내내 질척였다. 친구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새빨간 노을에 마음을 주었죠

어도어, 영원은 그렇듯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해 저문 시내는 한산했다. 난 기분을 환기할 겸 유리공예 상점에 들어갔다. 고깔 쓴 난쟁이들과 드레스 입은 천사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곧 문을 닫는다고 해서 급히 집에 가져갈 선물을 샀다.

 저녁 8시쯤 되니 운하를 경계로 상점이 있는 왼편은 사실상 암전이었고, 주점이 있는 오른편은 불야성이었다. 상점들이 이렇게까지 일찍 닫는 줄 알았다면 카페에 두 시간이나 머물지는 않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이라 마리를 만나 외로움을 덜었기 때문이다. 난 텅 빈 상점 거리를 천천히 걸어보기 시작했다. 간간이 사람들이 사분오열(四分五裂)했다. 바람이 찼다. 달디단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아이라 마리와 유설아가 번갈아 떠올랐다. 마리를 만난 것에 우연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않으려 애쓸수록 외로워졌다. 로손에 들어가 윈스턴을 5mg로 샀다. 서서히 친구에 대한 걱정이 심각해졌다. 어쩌면 지금쯤 연락이 와 있을 것만 같아 급히 호텔로 돌아가 와이파이를 켰다.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뉴스를 들여다봤지만 관련 소식은 물론 없었다. 일본에도 안전안내문자 비스무리한 게 있으리라 생각해 데스크에 대고 물어봤지만 친구의 이름은 없었다. 한 직원이 지나가듯 비에이 실종 사건을 언급해서 또 머리가 아파왔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직원은 그저 비에이에 사는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만 했다. 이곳 사람들은 불확실한 누설을 무척 경계하는구나,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오만 걱정이 들었지만 침착해지기로 했다. 희미한 지난밤을 신(Scene)별로 끊어 떠올렸다. 친구는 제리 초와의 대화 중반부부터 졸고 있었고, 간신히 숙소로 돌아갈 때도 반쯤 눈이 감겨 있었다. 들어와서, 들어와서······. 들어와서 자는 것 말고는 무얼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만일 아침에 산책에 나갔다면 연락 한 통 남기지 않았을 리 없다. 적어도 오는 연락은 받았겠지. 다음 날 오타루를 떠나 조잔케이로 가는 갓파라이너의 표도 친구가 가지고 있었다. 꼼짝없이 고립이다. 말로만 듣던 해외 실종 사례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불안한 마음으로 대사관 번호를 검색했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전화하기로 하고, 조금 차분해질 심산으로 가까운 주점에 들어가 맥주를 시켰다.

 한 가지 아리송하게 짚이는 것이 있었다. 꿈인지, 상상인지, 혹은 정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침에 친구는 잠든 내게 무어라 말을 걸었다. 이내 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고, 난 비몽사몽간에 고개를 한 번 들고 문을 쳐다봤다가 다시 쓰러졌다. 그 말, 그 말과 시간, 밝았으니 시간은 이른 오전일 테고, 그렇다면 무슨 말이었지. 무슨, 무슨 말이었을까······.



솔바람소리 그친 뒤에도 살아가노라면

정호승, 쓸쓸한 편지



 그레샴의 법칙.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이전의 좋은 기억을 몰아낼까 두려웠다. 친구를 잃을까 두려웠다. 여행을 망칠까 무서웠고, 웃으며 지나치는 비둘기 같은 사람들의 무리, 볼에 튕기는 얼음 조각들, 쉭쉭거리는 바람 소리와 차 소리가 정신없었다. 끝모를 외로움, 부딪치는 마리와 설아, 죄책감, 죄책감을 느끼는 것에 대한 자책, 얼음 조각, 비둘기, 사람, 자동차, 횡단보도, 바람, 담배 연기, 누군가의 투덜거림, 두려움, 무서움, 행방불명, 눈, 비에이, 직원, 운하, 아이라 마리, 유설아, 죄책감, 자책, 그리고······, 기억났다.


 친구는 제리 초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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