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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Jul 24. 2024

눈보라 편지

작은 슬픔들은 말하고, 큰 슬픔은 침묵한다.

세네카, 몽테뉴의 "에세"에서



 광활한 설원과 세찬 바람에 지쳐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열차의 불빛이 이물질과 닿아 생긴 그림자 같았다. 난 약간은 의아스럽게 위를 올려보았다. 불빛이 비추는 근저, 그러니까 머리맡의 짐칸에 둔 내 가방 밑으로 웬 종이가 한 장 끼어 있었다. 반쯤 삐져나온 종이는 위아래로 팔락이고 있었다. 난 옆에서 골골거리는 친구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 종이를 빼냈다. 잉크가 다 바랜 양피지에는 누군가가 줄글로 쓴 기행문 같은 것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몇 번이나 덧대 쓴 데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어둔 탓에 여간 읽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난 일전에 김화영 교수님께 배운 바를 살려 이 이상스러운 문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끝내 읽어내지 못한 대목 약간을 제하면 글은 기행문이라기보다는 전언에 가까웠고, 일종의 소설 같기도 했다. 저자는 제삼자의 편지로부터 비롯된 사건을 옮기고 있었다. 난 다 낡아빠진 이 종이를 붙들고 꽤 고통스러운 시간을 할애했으므로, 빛바래지 않도록 이곳에 기록해 둔다.



 돌아가는 길은 어두웠다. 터널의 안팎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먹을 풀어놓은 밤이었다. 간간이 천정이 타닥거렸다. 눈은 내내 왔고 밤새도록 올 것이다.


 바람이 몹시 불던 제루부 언덕에서 이 편지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내 여행은 진작에 끝났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은 어두웠다'는, 약간은 푸념처럼 들리는 말로 시작되는 긴 편지는 오래지 않은 동안 그곳을 떠돌고 있었던 것 같다.

 켄과 메리 나무의 맞은편 산장에서 머물던 날, 난 멀리까지 산책을 나왔다가 길을 잃었다. 나침반은 얼개가 나갔고, 몸은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았다. 난 시야를 간신히 유지하며 온 길을 더듬어 돌아갔다. 몇 번이나 차라리 눈보라에 휩쓸려 죽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천우신조, 저 멀리 우리 숙소에서 비추는 듯한 불빛이 정말 다행스럽게도 보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어디선가-아마 북동쪽이었던 것 같다-두꺼운 서류 뭉치가 내 옆구리를 강타했다. 난 너무 놀라고 아파 넘어졌고 그 뭉치는 내게 의지해 바람의 길을 벗어났다.

 숙소에 돌아와 뭉치를 봉한 끈을 풀고 보니, 거기에는 본인을 타국의 젊은이라고 소개하는 아주 기다란 한글이 적혀 있었다. 난 어쩌다 보니 그 글을 아주 몰입해서 읽게 되었는데, 뭐랄까, 얼기설기 엮여 있었지만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회한이 담겨 있었다. 글의 말미로 미루어 보아 젊은이는 어떤 사람에게 이 글을 전하거나, 어딘가로 가져가고 싶은 것 같았다. 전반적으로 일종의 연서 혹은 일기장 같은 분위기였지만, 여정의 피로와 삶에 관한 일반적인 고민들도 간간이 섞여 있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난 이 청년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온 젊은 남자인 것 외에는 그에 관한 어떤 신상이나 주소도 알 수 없었다. 이 연서를 받게 될 사람은 단지 Jane이라 적혀 있었다. Jane······, 흔한 이름이었다. 주인에게 이 연서 뭉치를 보여주며 Jane이나 이방인에 대한 정보를 물었으나, 그는 어리숙한 동경으로 설국을 나다니는 소설가가 어디 한둘이냐며 퉁명스레 답했다. 난 무안한 나머지 서류를 방 한켠에 던져두고 이내 잊어버렸다. 나 자신 설국을 유람하기도 바빴던 것이다.     

 그러다 내 휴가도 끝이 다가와, 홍콩으로 돌아가기 전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숙소 1층 소파에서 무어라도 홀짝이고 있는데 갑자기 온통 눈을 뒤집어쓴 어떤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본인을 Jane이라 소개했고, 대뜸 방이 있냐고 물어봤다. 한창 감상에 젖어 있던 난 시큰둥하게 주인의 방을 가리켰다. 그녀는 거의 90도로 허리를 꺾더니 성큼성큼 주인의 방으로 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가만히 생각하자니, Jane이란 이름이 너무 낯이 익었다. 아, 설마! 난 순간 약간의 소름과 희열을 느끼며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Jane은 나의 탄성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날 흘긋 보더니 주인의 방 문을 세게 툭툭 두드렸다. 난 2층의 내 방으로 허겁지겁 달려가 그 뭉치를 챙겨 나왔다. 내려와 보니 1층에서는 주인이 Jane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Jane은 이곳에 얼마나 머물지 아직 본인도 모른다는 입장이었고, 주인은 날짜가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으면 입실이 불가하다며 Jane을 내쫓으려 했다. 난 주인에게 다가가 밤이 늦고 추워 달리 갈 곳이 없을 거라고, 우선 이틀만 지내게 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Jane도 열이 오른 얼굴이었지만 내 말에 수긍했다. 주인은 Jane에게, 만일 이틀이 지났는데 다음 손님이 생기면 열외 없다고 강조했다. Jane은 어서 방이나 소개해 달라고 쏘아붙였다. 주인의 성격이야 원래도 그 모양이었지만, Jane의 성격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모든 일이 대략 정리된 후, 난 Jane의 방에 노크했다. 다행히 Jane은 낯선 사람을 크게 경계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난 그녀에게 여독이 있어 보인다며 따뜻한 정종을 권했다. 그녀는 흔쾌히 공용 소파로 나왔다. 주인은 오늘은 절대로 그녀에게 무언가 해줄 것 같지 않아서, 난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를 동원해 정종을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주기 무섭게 이름이 Jane이 맞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혼동하는데, 그녀는 Jane이 아니라, Jay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녀의 한국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며, 편하게는 J라고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내가 얼마나 아쉬웠는지 읽는 누구든 알 것이다). 나중에 그녀는 한국어로 자기 이름을 쓰는 법도 알려줬는데, Jane에는 'ㄴ'자가 들어가야 한다며 영어로 치면 'n' 발음이라고 알려주었다. 난 왜 한국어에서는 Jay와 Jane 사이에 'n'과 관련된 차이만 있고 'e'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요컨대 그녀의 이름은 한재이었다. 언젠가 일기를 쓴다면 J라 기록해도 되냐고 물으니 웃으며 좋다고 했다.

 난 그녀에게 대뜸 이름을 물어본 것을 사과하며, 일전에 구한 의문의 서류 뭉치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이와 더불어 내가 해독하지 못한 이상한 기호들에 대해서도 말했다. J가 무척 궁금해해서 난 그녀에게 원본을 보여주고 내용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도 곁들였다. J는 흥미롭다는 눈길로 한참 동안 글을 읽어내려갔는데, 그녀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지고 거의 고개를 박듯 읽기 시작해서 난 하는 수 없이 J의 팔을 치며 환기시켜야 했다. 그녀는 작자가 글 옆에 적은 단어들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했는데, 이는 본토인들도 잘 알아볼 수 없게 휘갈겨 쓴 한국어였다. '일몰, 안개, 눈 내린 강가, 183번 국도, 나무, 성이 같다.' 난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고, J도 아리송한 것 같았다. J는 한참 생각하더니, 잘 모르겠지만 젊은 남자는 작가가 아닐까,라고 말했다. 조금 일차원적이지만 틀린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왜 그녀의 표정이 그렇게까지 어두워졌는지를 물었는데, 그녀는 한참 동안 대답을 찾는 것 같았다. 어렵게 꺼낸  그녀의 말을 듣고 난 전율했다. 내용인즉슨 J에겐 친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의 이름이 Jane이며, Jane은 1년 전부터 삿포로 시내에서 사진 일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건 2주쯤 전으로 비에이에서 찍은 사진을 보낸 것을 끝으로 계속 소식을 모른다고, 한국에서는 손 쓸 수 없어서 일단 일본 대사관에 신고하고 본인도 비에이로 급히 왔다고 말했다. J는 울진 않았지만 무척 슬퍼 보여서 난 그녀의 손을 잡으며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다음 날, 짐을 챙겨 나서려는데 편지 뭉치가 보이지 않았다. 난 J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방에 없었다. 그 순간 내가 속으로 했던 오만 상상들을 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원래 그 편지 뭉치를 아침에 J에게 주려 했지만, 난 홍콩에서 출판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편지가 혹 출판되어도 가치가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J에게 주되 어떤 형태로든 복사해서 나도 가지겠다는 허락을 받으려 했는데 자료는 없고 J도 자취를 감추니 별별 오해를 다 하게 된 것이다. 난 거의 30분 가량을 고민하다 결국 하루 더 머무르며 J를 만나기로 했다. 다행히 주인은 내가 묵은 방이 아직 비었다며 하루의 편의는 봐줄 수 있다고 했다. 난 혹 J와 엇갈릴까 멀리 나가지 못하고 숙소 주변을 산책하거나 공용 냉장고를 뒤적거리면서 소일했다. J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고, 날 보고 깜짝 놀라며 간 것 아니었냐고 물었다. 난 지친 눈빛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받을 게 있어서 기다렸다고 했다. J는 당황스럽다는 듯 한 발 물러서며 무얼 원하느냐고 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손톱을 세우는 길고양이 같았다. 난 한 걸음 더 다가서며 편지를 돌려달라고 말했다. J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내가 갖고 있지 않냐고 물었다. 오늘 아침 내가 떠난다는 걸 잊어버린 탓에 편지를 달라고조차 말하지 못했다고 그녀는 나의 추궁에 항변했다. 어젯밤 내가 마지막으로 갖고 들어갔는데 그럼 자기가 훔쳤다는 거냐며 J는 외려 날 몰아붙였다. 난 미심쩍었지만 그럼 편지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J는 자기도 모른다고, 혹시 잃어버렸냐고,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댔다. 실로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봐도 없는데, 설마 다른 누가 가져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작자 미상, 비에이 산 재록양피지



 내용은 이쯤에서 끊어져 있었고, 도착해서 내가 탄 객실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처럼 너덜거리는 어떤 종이도 보이지 않았다. 추측건대 저자는 열차 안에서 뭉치로 된 이 전언을 따로 꺼내둔 모양이었다. 내리는 와중에 첫 장만 떨어져 아직 여기 남아 있던 것이다. 종이의 가벼운 특질상 오래 있었을 리는 없고, 어쩌면 내 바로 직전의 발착, 그러니까 열차가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로 오던 시점에 저자는 타 있던 것 같다. 아사히카와는 삿포로와 비에이의 유일한 경유지다.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까지 온 열차는 그 길을 다시 돌아가고, 비에이로 가려면 또 다른 열차를 타야 한다. 저자는 혹 다시 비에이로 가려던 걸까. 그래서 아사히카와까지도 온 걸까. 난 우리가 탄 완행열차의 시간표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놀랍게도 아사히카와에서 비에이로 가는 막차가 있었다. 어딘가 내 예상이 들어맞는 기분이라 순간 경직되었다.



눈 감으면 너의 머릴 흩트리는 무역풍의 밤

전기뱀장어, 적도



 만일 산장의 주인이라는 양반 말마따나 저자가 발견한 서류 뭉치가 소설이라면 내 손에 들린 종이 또한 소설에 불과, 즉 웃어넘길 일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진실이라면, 과연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펼쳐지고 있는 건지, 저자는 왜 이 시각 다시 비에이를 찾아가고 있는지 두려워졌다. 저자는 본인을 홍콩의 출판업자라 했으니 요즘 세상에 수소문하면 윤곽은 잡을 수 있을 터였다. 난 친구에게 이 종이를 보여주었다. 친구는 한참 저어하더니 어찌됐건 남의 슬픈 이야기, 관여하지 않는 게 신사답다며 뒤를 사렸다. 만일 그 다음 말이 없었다면 난 그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우린 그때 현지인에게 소개받은 부타 헤이(Buta Hey)라는 이자카야에서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는데,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친구는 가만히 밖을 내다보다 뇌까렸다.

- 어쩌면, 답은 눈 속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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