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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Jul 22. 2024

연착륙

 꿈 속에서, 기차는 발치가 하얗게 젖어 있었다. 삿포로의 눈은 침묵하는 법이 없었다. 밤새 내린 눈은 낮이면 선로의 이음매에서 올라 철도원의 베레모 위를 노녔다. 눈은 쉼없이 노래했다. 눈발은 두텁고 눈보라는 상그러웠다. 낭보(朗報)였다. 



그건 너의 탓이 아니야

윤상, 영원 속에



 30분 연착된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다. 온 세상이 새하얀 곳에서 한 달쯤 살아 보고 싶다고. 눈뜨고 잠들기까지 눈길만을 돌아다니자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글쎄, 두 시간 정도 걸으면 머리가 지끈거릴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자연스레 되뇌이겠지. 그건 네 탓이 아니라고.

 난 요즘 습관처럼 '영원 속에'의 마지막 가사를 떠올린다. 누군가 내게 그 말을 해 주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너만은 그렇게 말해 주면 안될까, 부탁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오래 전에 날 떠났고, 난 아직도 그들이 생각난다.



이제는 소식마저 알 수 없는 타인이 됐지

동물원, 잊혀지는 것



 그 사람의 자세한 소식을 모르는 건 어쩌면 다행이다. 소식조차 알 수 없는 타인. 풋사랑에 관한 진실이란 정말 그렇겠지. 그녀가 좋아한 '동물원'의 노래에 자주 나오는 말처럼.

  모조리 쏟아내려던 시절은 지났다. 슬픔도, 분노도 더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에 관한 잔상은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임대형, 윤희에게



 맞은편에서 창문을 내렸다. 난 머쓱한 눈치로 고개를 돌렸다. 모든 사람이 나만큼 감상의 길이가 길진 않다. 달팽이가 잎사귀 한 치를 옮겨가는 동안 인간은 달팽이를 사육할 준비를 끝낸다. 몇 해 전, 프랑스 파리의 오르셰 미술관에 간 적이 있다. 당초 오전에만 둘러보고 루브르로 이동하려 했으나, 저녁나절까지 계속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날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은 루브르를 거쳐 멋진 카페의 센 강 뷰를 획득했을까. 난 후회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지나, 크로와상과 커피를 들고 강둑을 걸으며 문득 흘리던 멜로디는 그대로 방황의 시작이었다.

 기내식을 먹고 '윤희에게'를 마저 봤다. 두 주인공이 만나는 잠시로 끝날 줄 알았던 영화는 꽤나 긴 에필로그를 끌어갔다. 그 맺음말을 통해 이 영화의 주제가 그리움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립기만 하다면 끝이 아니다. 끝은 반드시 희망이어야 한다. 어딘가 당위적인 구석도 있는, 그래서 약간 거칠었던 걸까, 이 영화의 숨소리는.



전투하듯 우리 사는 동안에도 조금도 바꾸지 못한 네 얼굴

루시드 폴, 국경의 밤



 북해도 반경으로 접어들며 점점 하늘이 흐려졌다. 비행기가 한참 중력과 줄다리기하는 동안 난 잠에 빠졌다. 어느새 착륙. 유키 구라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타이틀 넘버가 나왔다. 일본에 도착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밖에는 눈이 소슬하게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복잡한 세관 절차를-그나마도 QR코드를 등록해 둔 덕분에 조금 빨랐지만-거쳐 공항 3층 구석에서 환전을, 이후 안내 창구에서 기차표를 받았다. 레일패스는 유럽과 마찬가지로 종이였지만 사용할 때마다 기록해서 검사받을 필요는 없었다. 지정석 예약을 할 수 있었고, 우린 안내원 미타 상의 도움으로 첫 저녁을 무사히 시작했다. 그녀는 한국어를 정말 능숙하게 구사했는데, 내내 콜록거려서 미안할 지경이었다. JR선을 타야 하니 안내판을 잘 보고 신삿포로 방면의 기차를 타라며 그녀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감기 조심하세요, 한국어로 말하니 손을 모으며 무척 쑥스러워했다.

 기차는 발치가 하얗게 젖어 있었다. 눈은 선로의 이음매에서 올라 철도원의 베레모 위를 노녔다. 얼음결정이 서걱거리는 창틀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눈은 호박꽃에 나앉은 흰나비처럼 신나게 날개를 펄럭였다. 눈보라가 기차를 휘몰아 세상은 빠르게 바뀌었다. 신 치토세 공항을 빠져나가는 몇 개의 터널을 지나, 설국에 멎었다.



언제 이토록 서로를 미워하게 된 거야

윤상, 배반



 이곳의 일반열차는 주로 지상역을 지나 빛과 어둠이 자주 엇갈렸다. 어스름이 서린 도심은 눈으로 자욱했다. 이 순간을 결코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열차는 언제나 여행의 도화선이었다.

 열차에는 현지인과 서양계 외국인도 몇몇 있으며, 알고 보니 비지정석에는 현지인이 무척 많았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 열차가 '폴라 익스프레스-역무원도 정말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했다-'이거나 '카'의 레디에이터 마을을 지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창가는 습기로 점점 더 부얘지고, 드문드문 가로등 불빛이 밤을 비췄다. 난 아랫목이 후끈한 열차에 몸을 담갔다. 열차는 카스테라처럼 쌓인 천장의 눈을 털어내며 신삿포로를 지나쳤다. 가슴이 찔리는 줄도 모르고 장미를 끌어안는 늙은 어린 왕자처럼, 언젠가 이 시간이 미치게 그리워질 것 같았다.



쓸쓸하던 그 골목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조덕배, 나의 옛날 이야기



 삿포로역에서 스스키노역까지 가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우린 창구를 찾아 한참 헤맸다. 결국 난보쿠 선이라 이름된 지하철 노선은 내려가야 있다는 귀띔을 듣고 따르게 됐다. 지상과 지하라는 차이만 눈치챘으면 곧장 지하로 갔을 테지만, 어쩌겠는가, 지하철이 마치 고유명사 같아 단어 합성을 떠올릴 생각조차 못 했는데.

 스스키노역 4번 출구로 나오니 눈이 맑게 내리고 있었다. 니카 상 거리로 불리는 그곳은 허리까지 쌓인 눈담장이 사거리의 울타리를 짓고 있었다. 관광객보다 현지인이 많고, 구석구석 알토란 같은 소상점이 들어서 있을 것만 같은 곳. 우린 그중 몇 곳이나 들러 볼 수 있을까. 난 새삼 기대하고, 한편 애석해하며 호텔로 들어섰다.

 로비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놀라야 했는데, 내가 서툴게 일본어를 쓰려던 찰나, 호텔리어는 그야말로 한국인과 다름없는 우리 말로 우리를 환영했다. 그녀는 본인이 한국인이며, 모종의 이유로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난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이곳이 설국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그녀의 삶에는 소설적인 여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우리 방까지 찾아와 청결 상태를 재차 점검하고, 창문의 잠김을 풀어 주며 편하게 이용하라고 했다. 이후로는 한국어를 쓰거나 들을 일이 없었기 때문일까, 미타 상과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호텔리어가 더욱 애틋하게 떠오른다.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우리 여행은 순조롭게 돛을 올렸다. 고마운 일이다.

 짐을 정리하고 미리 보아둔 식당으로 갔다. 조각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다정스러웠다.



난 저 별에게 다짐했어

이소라,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밤늦게 거리를 거니는 실루엣을 좋아한다. 그 모습 안에 내가 있어도 좋지만, 어느 영화나 사진에서처럼, 그러한 장면 자체가 주는 고즈넉함이 좋다.  

 언젠가는 참 많이 걸었다. 술에 취해서도 걷고, 골목을 구경하려고 걷고, 감상에 젖으려고 걷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잘 걷지 않는다. 아니, 천천히 걷지 않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고개를 돌려대며 생각에 잠기는 일은 없다. 술을 마시고 집 앞 공원을 서성일 때, 에전에는 그 시간이 좋았다. 그 시간이 건드리는 공허감이 무언가를 일깨워주곤 했다. 성찰이라는 꽤나 생산적인 계기도 되어주었다. 이제는 잘 되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외로워서겠지. 공허란 게 정말 견딜 수 없이 텅 비어 버려서.

 그렇거니 한때의 기쁨이 슬픔이 된 것은 점점 더 당연한 동시에 무감각한 터라, 걷던 날의 몇 가지 뚜렷한 잔상을 적어둔다. 첫째,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에서 골목길을 따라 걷다 만난 호숫가와 백조 부부. 둘째, 어느 날 새벽 심야 택시와 서울역. 육교 건너로 짙게 드리운 안개, 열려 있는 아무 호텔 로비 소파에서의 노루잠. 셋째, 군 복무 시절 갖가지 마음과 형상으로 마주한 석양, 시선만이 내 양화 사진기였으니. 넷째, 상수동을 정처 없이 떠돌던 날, 더는 이 편지를 미룰 수 없게 만든 낡은 다방. 다섯째, 삿포로에서의 첫 새벽, 잠들기 싫어 쏘다니던 니카 상 거리와 처마가 내려앉을 듯한 작은 주점.


 사장은 손님들 앞에 호롱불 하나씩을 내어놓았다. 사람 수만큼 불을 켰고, 떠나면 껐다. 사장은 새벽 1시가 지났는데도 따뜻하게 날 맞아주었고, 불 때문에 광대가 무섭게 튀어나온 광고 대행사 직원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난 손짓을 섞어가며 일본어를 썼고, 그들은 무척 친절했다. 왜 정종 글라스 한 잔이 880엔이나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종의 심야 할증 같은 것이겠지. 3시가 넘어서야 돌아갔으니.



어느새 하늘은 섧은 어둠으로 빛나고

짙은, 해바라기



  걷던 날의 여섯 번째 잔상을 적는다. 설아야, 네가 발끝이 까지도록 나와 걸어주던 가을을 잊었을 리 없다. 돌아가던 길, 난 서벅거리는 단아한 거리에 잠겨 물었다. 그땐 무엇에 그렇게 가슴 떨렸나, 뭐가 그리도 간절했을까, 대체 뭘 그리워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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