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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Aug 02. 2024

망설임

눈물은 보이지 말기

에피톤 프로젝트, 그대는 어디에(feat. 한희정)



 어떤 시절을 거침없이 보냈다 한들 뒤돌면 일장춘몽. 말은 글보다 철없고 글은 말보다 교활하여 거짓의 기댈 곳은 늘어만 간다. 설아야. 우린 서로를 얼마나 속였을까. 난 지금, 너를 얼마큼 속이고 있는 걸까.

 혹 내가 거짓을 곧잘 주워섬겼다 한들 천려일실, 결국 하나를 커다랗게 잃어버렸으니. 한바탕의 봄꿈이었나. 늘 푸르고, 어리고, 또 여렸던 건 누구의 탓이었던가. 아니, 어쩌면 누구의 탓도 아니었을까.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어떤 이유로든지 난 많이 지쳤다. 반복되는 우연은 간과할 수 없는 법. 여로의 가장 힘들었던 대목을 시작하려는 지금, 난 그때처럼 아프다. 조금 행복한 문장을 쓰고 싶다.


 친구는 기약없이 먼 길을 떠났고, 난 예정대로 숙소에 돌아갔다. 술이나 더 마셔 볼까도 싶었지만 흥미가 돋지 않았다. 가슴패기가 다시 쑤시기 시작했다. 북해도에 와서는 잠잠하던 통증이었다. 설아를 생각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착잡했다.

 설아야, 너를 생각했는데 왜 힘을 내지 못했을까. 심지어는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난 정말 약속을 지키고 싶은데. 네가 다시는 날 바라보지 않는다 해도, 내 이름을 네게 들려줘야 하는데. 대체 왜 힘을 내지 못하는 걸까. 왜 전처럼 가슴이 떨리지 않고 하냥 아프기만 할까. 난 급기야는 병이 도진 사람처럼 뒤척이며 밤을 지샜다. 새벽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비에이에 도착해서 호텔에서 하루 묵어간다며, 몇 마디 사과와 당부를 보태고 있었다. 난 씁쓸하게 무운을 빌어줬다. 그밖에는 도리가 없었을 뿐더러, 친구에게 괜한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행선지는 아는 상태니까.

 새벽 하늘은 마른 파랑. 가만히 창밖을 내다봤다. 눈이 토닥이듯 쌓이고 있었다.



길 가는 동안 내가 지치지 않게

그대의 꽃향기 잃지 않으면 고맙겠다

이수동, 동행



 길 가는 동안 내가 지치지 않으려는데, 그대의 꽃향기는 어디에 있나? 함께 오르던 그 길은 어찌 가파르기만 했나? 먼저 손을 놓은 건 누구인가? 내가 그대의 꽃향기를 잃은 건 정녕 누구의 탓이란 말이냐.

 다음 날, 눈이 그쳤다. 난 깎아지르듯 길다란 오타루의 골목 사이사이를 밟으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눈길만은 무해했으나 난 지쳐 있었다. 조잔케이로 가기 위해, 삿포로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설아야, 무해하지 않다면 유해한 걸까? 무해란 순수의 이를 데 없는 경지인 걸까. 순수란, 세상을 상대하는 깨끗한 마음이려나. 그렇다면 난 무해한 사람이 아니겠지. 너에게 상처를 준 건 물론이고, 세상에 대한 정갈한 믿음도 그닥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 그나마도 무해에 가까운 종류도 있을 테지. 하물며 새하얀 눈길에 찍힌 여우 발자국 같은 것이라도. 모르기는 하되,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언젠가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좋은 사람에 대한 보통의 결론에 우린 다다를 수 있겠지. 살다 보면 한 번은 다다르겠지.

 창밖 멀리 성당의 십자가가 보였다. 나지막이 성호를 그었다. 가슴이 덜 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한 번 그었다. 선잠처럼 놓는 묵언의 기도. 열차는 어느새 신삿포로 역에 다다랐다. 짐을 챙겨 한창 붐비는 문앞에 끼었다.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내리는 중에 난 누군가와 어깨를 세게 부딪쳤다. 그 사람은 바쁜지 뒤돌아보지 않는 듯했다. 고갯짓하고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내 팔을 붙들었다. 난 놀라 얼굴을 들었다. 내 팔을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아이라 마리’였다. 릿쿄 대학 국문학부 3학년, 윤동주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좋아하는 소녀. 오타루의 운하에서 석별한, 내 가슴에 호롱을 남긴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시간은 양자 역학의 단위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마리는 역시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졌다가, 멍한 표정의 나를 향해 해사하게 웃었다. 그 모습은 -설아야, 양해를 구해본다만-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우린 가만히 서있다 떠밀리듯 열차 바깥으로 나갔다.

 난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들렀다가 역 부근에서 조잔케이행 갓파라이너를 타야 했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그녀와 말을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마리 또한 조잔케이에 간다고 했다. 우린 나란히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친구를 찾지 못했냐고 물었고, 난 트렁크를 가리키며 여기서 자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그녀는 깔깔대며 웃었는데,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비웃지 말길 바란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원래 좀 돌아버린 농담을 좋아한다. 난 비록 문장가의 소질은 없지만 설아를 만나 봤기에 잘 안다. 이야기 도중 마리는 드디어 내 이름을 물어봤는데, 듣고서는 꽤 특이한 이름이랬다. 난 한국에서 김 씨는 일본의 무라카미만큼 흔하다고 답했다.

 13시 37분. 박물관을 거쳐 조잔케이행 갓파라이너 버스에 무사히 탑승한 난 가슴의 통증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마리와 떠들었다. 그게 반드시 마리의 영향이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글을 쓰는 지금, 다시 철저히 혼자가 되어 생각해볼 때, 그때도 지금도 난 함께할 사람을 원했을 뿐이다. 그 상대가 아이라 마리여서 더 특별했다는 것까지만 인정하련다.


 설아야, 알지. 내가 내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걸. 아이라 마리와 나눈 수많은 대화 중에도 역시 내밀한 고민이나 아픔에 대한 건 없다시피 한다. 혹시 기억하니? 허건민. 왜, 있잖아. 내 고등학교 친구. 우리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대학에 놀러왔던 안경잡이. 너, 그때 정말 얄밉도록 잘 했던 것 알아? 너 덕분에 내가 아직도 질투 섞인 조롱을 받아. 난 연인이라면 서로의 친구들에게 서로의 낯을 세워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믿는데, 그렇다면 넌 정말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해 주었어. 네가 내게 달려와 안기던 사거리를, 내 품에서 건민이에게 건네던 수줍은 인사를 난 아직 기억하고 있어.



다시 내게로 돌아올 길 위에 울고 있다고

패닉, 기다리다



 아마 너와 헤어지고 한 달쯤 됐을 때일 거야. 난 건민이와 매일 만나 함께 음악을 만들고 있었어. 그날 저녁, 녀석이 자꾸 막걸리나 한 잔하자는 거야. 우리 작업실 앞에는 소갈비찜을 선수촌 급으로 만드는 식당이 있었거든. 마침 술을 안 마신 지도 꽤 되어서, 좋다구나 따라갔지. 고기를 양껏 뜯고 이미 거나해졌을 무렵, 녀석은 작정한 듯 의미심장한 말들을 쏟아냈다. 뭐, 이제 와 들려준들 달라지는 건 없겠지.



건민: ······내가 널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니고, 네 고집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야, 네가 괜히 겸손한 척해도 사실 너의 잘난 면을 모르는 게 아니란 것도 난 알지. 네가 예전에 어땠는지, 왜 지금은 살짝 의기소침해졌는지, 아님 왜 그렇게 칼 같은 눈으로 네 앞에 떨어진 것들에만 몰두하는지, 그래, 넌 특별한 이유 없이도 그렇게 하더라는 것도 알아. 너랑 하루이틀 보냐. 근데, 그래도 난 네가, 얘기를 좀 해줬음 좋겠어. 뭔 내용이든 상관없으니까, 내용이 없으면 없다고, 있으면 있다고. 넌 너무 얘기를 안해. 분명 네 안에 뭔가 변했는데 매일 얼굴 보는 내가 그 이유를 몰라. 그러다 어느 날 뜬금없이 보고 싶다, 잘 지내냐, 한 마디 툭 던지고 다시 사라지겠지. 내가 좀 예민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난 그런 게 참 견디기가 힘들 때가 있어. 그래도 친구라는 게 서로 어려운 걸 공유하고 힘은 못 돼도 힘내란 말해주고, 그런 것 아니냐. 내 친구로서의 쓸모는 없는 느낌이랄까.

나: 나 별일 없는데······.

건민: 너 유설아랑 헤어졌지. 응······, 얼마나 됐냐.

나: 아, 어······, 한 한 달 됐을 걸?

건민: 그래. 너 그 한 달 동안 나 매일 봤지. 근데 한 달 내내, 난 네가 헤어진 줄도 몰랐어. 네가 언젠가부터 설아 얘기를 안 하길래 난 오히려 안정적으로 지내서인 줄 알았어······. 그러다 오늘 아까 네 작업실에 같이 있는데, 있잖냐, 아니, 사진이 없어. 어? 있어야 할 자리에 사진도 없고, 그래서 이리저리 돌아보니까 편지봉투도, 예전에 받았다던 인형도 없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도대체 언제부터 없었는지를 모르겠어. 너도 사람인데, 네가 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티내고 다녔는데, 만약 오늘 헤어졌으면 당연히 미동이 있을 것 아냐. 근데 이 양반이 태도가 너무 멀쩡해. 물어보자니 또 아닌 것 같고. 그래서 일단 한 잔 하자고 한 거다.

나: ······그랬구나. 미안하다. 사실 얘기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그렇잖니. 혼자만 알기도 벅찬데다, 얘기한들 상황이 바뀌는 건 없으니까. 무엇보다 너는 또 네 일이 이미 힘든 사람인데, 이야기해서 괜히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고. 뭐, 이유란 다양하겠지만, 결국은 그래. 미안하다. 얘기할 자신이 없었네.

건민: 그래도 해 줘야지. 인마, 일단은 옆에 친구가 있는데, 귀띔이라도 해 줘야 내가 눈치라도 보지. 넌 내 힘든 거 다 듣잖아. 야, 심지어 당일도,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이다. 한 달 동안 맨날 봤어. 근데 네가 진짜 사랑한다는 여자를 잃었는데 그걸 매일 보는 단짝이 몰라. 너 이게 상식적이냐? 왜 나를 이렇게 서운하게 만드는 거야. 서운한 건 대수가 아냐. 그래, 서운한 건 정말 중요하지 않아. 근데 왜 미안하게 만드는 거냐. 네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는지도 모르고 한 달 동안 옆에서 속없이 굴어댄 것 아냐. 야, 이 새끼야. 그럼 난 뭐가 되냐.

나: 글쎄······ 그런가. 근데, 얘기하면 진짜 끝날 것 같았어. 나 혼자 생각하면 괜찮아. 근데 입밖에 나가는 순간 나만의 사실이 아니게 되니까. 그게 싫더라.



 취중진담이 아니면 건민이가 그렇게까지 말했을 것 같진 않다만, 별개로 나도 참 특이한 것 같아. 너와 헤어지고 생각해 보니 주변의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안 했던 거야. 그때도 심지어 건민이가 물어보지 않았으면 두 달, 세 달이고 말을 안 했겠지. 모르겠어. 생각 외로 그날 건민이에게 위로를 많이 받았거든. 사실 내겐 언제나 함께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때까지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던 거겠지. 네가 없다는 것은 일종의 폭풍이었으니까. 그래, 솔직히 힘들었어. 특히 너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꺼내고 싶지 않았어. 꺼내는 순간 내가 붙들고 있는 나머지도 쓸려나갈 것 같았어. 난 숨죽여 널 기다리며 실은 내가 널 떠났다는 걸 부정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난 혼자였고, 누군가를 좋아하려다 제 풀에 꺾여 도망쳤고, 누군가 나를 좋아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정작 그 누구도 쉽게 다가오지 못하게 했어. 웬만한 로맨스 영화는 다 봤으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고,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저녁을 먹는 걸 좋아하면서 그 중 무엇에도 흥미가 없는 척했어. 내 눈에는 이미 과분한데 외려 내게만은 부족하다고 건방을 떨고, 언제든 아무 말이나 해도 괜찮은데 귀찮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라고 거짓말을 친 적도 많아. 실은 내 속내를 몇 시간이고 떠들며 상대를 지치게 만들 수도 있으면서, 어쩌다 살짝이라도 내밀한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며칠이고 미안해했어. 네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을 이야기를 너무 오래 듣게 해서 미안하다. 너의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다. 너의 감정을 소모하게 해서 미안하다. 다음 번에 만나서도, 운좋게 그 다음에 만나서도, 난 내내 그것이 미안했다고 말하고 또 말하고······. 그렇게 떠나보낸 이가 몇이며, 앞으로는 또 몇일까. 속아서 날 떠난 이들도 있겠지. 망설이다 떠난 이들도 있겠지. 그래, 지금쯤이면 벗어나야 하는데. 너와의 이별이 촉발한 버릇이 뫼비우스의 띠가 되면 안 되는데. 다행히도 이쯤 오니 널 조금은 잊은 것 같은데. 너도 내가 좋은 사람을 만나 보다 성숙한 사랑을 하길 바랄 텐데. 분명히 그럴 텐데. 은정이의 말처럼, 난 사랑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말야.


 어쩌다 보니 너무 대중없이 쏟아냈구나. 부끄럽다.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인정한다만, 참 지질한 고백이다. 실망은 하되 한심하게 여기지는 말길 바란다. 변명하건대, 내 사랑만큼이나 상대가 느낄지 모를 부담도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일모도원, 아직 갈 길이 먼데 날은 저물고, 미안하지만 잠시 쉬어가야겠다. 떠나버린 친구의 소식을 궁금해한 독자들에게 고맙다. 온천이 아름다운 조잔케이의 료칸에서 일어난 일들은 역시나 꽤 유별났으니 시간을 두고 적어 보겠다.

 구태여 다음으로 미루는 까닭의 중차대한 하나로써,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유설아에게. 지금부터 이 글이 끝나는 날까지 방금 막 전해듣게 된 소식에 구애받지 않을 자신이 없구나. 이기적이래도 꼭 축하해야겠지. 더욱이 능소화가 피는 6월의 첫 날이니까.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류근, 축시



 설아야,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행복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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