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웅재, 소원
전부로는 쓰라린 기억도 일부는 산뜻하다는 사실을 견지한 건 내 이성이고, 그 사실을 마치 초봄에 두리번대는 눈꽃처럼 포장한 건 내 감성이다. 하지만 설령 영웅심리라 해도, 본고의 저의(底意)가 정직하지 못함을 밝히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설아야, 미안하다. 너와 행복했던 시간을 버무려 내보인 건 내 얄팍한 글솜씨로 군생활에 약간의 편리를 도모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난 불과 일등병이다. 끄덕일 일보다 경례할 일이 많고, 주장할 일보다 따를 일이 많다. 동시에 내가 근무하는 곳은 도무지 감상에 젖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드넓고, 함께 근무하는 윗분들은 사심 없이 날 알아준다. 현란했지. 잘 보이고 싶어서 혀를 마구 놀린 게 시작이었다. 짐작이 가니? 그래, 사회학과인 것도 금세 들켰어. 이유인즉슨 말을 너무 잘 꾸민다더군.
보급이 주 업무인 우리는 멀리 나가서, 2톤 트럭에 물자가 다 실릴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예사였다. 보나마나 시간 떼우기용 이야기꾼은 나였지. 땡볕 아래 남자들끼리 있으니 뻔하지 않겠니, 결국 연애사가 제일 재밌는 거야. 난 철없게도 너와의 새내기 생활을 얘기하고 말았다. 내밀한 대목은 뺐지만, 어쩌겠니, 듣는 사람만 좋으라고 떠든 꼴이 됐지. 그러다 얘기가 재밌었는지 한 선임이 '월간 공군' 잡지에 공모해 보면 어떠냐는 거야. 선정되면 나는 물론 부대에도 좋은 일이라면서. 순간 혹했지. 내 군생활이 편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같았어. 일병의 흔한 일탈심리라고 생각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만, 부끄럽구나.
그렇게 "2022년, 봄"을 적어서 공모했다. 다음 편까지 달라길래, "일람표"와 "첫사랑 풋내길"을 묶어서 보냈지. 네 번째 편을 쓸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중대장님이 날 불렀다. 단 세 편으로 내 글이 올해 상반기 연재에 선정됐다는 거야. 아직 별 내용도 없는데 어째서 뽑혔냐고 여쭈니, 뭐라더라, 공보실장님이 전화하셔서 ‘김진훈 일병은 앉혀서 글이나 쓰게 시키라’고 하셨다더라. 그래, 말도 안 되는 칭찬이지. 게다가 난 공군 본부와 부대 차원의 막대한 포상 휴가를 받았고, 대장님 주선으로 부대 전체가 회식을 했다. 내게는 다시없을 좋은 일이었지만, 너에게 죄책감이 들었지. 네가 날 싫어하게 되거나, 내가 널 잊었다고 생각할까 봐 겁이 났단다. 우리 얘기를 멋대로 꺼낸 것도 예의가 아니라 여겼고. 물론 세간의 많은 사랑 얘기가 예술가의 일방적 경험에 기인한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김동률처럼 노래로 쓰기 전에 헤어진 연인을 찾아가 허락받는 경우도 있잖아. 진심으로 너를 생각한다면 나도 그랬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지금처럼 범용한 수준으로 알려질 각오를 했다면 말이지. 난 너를 향한 진심도, 나의 필력도 모두 간과했던 거야.
어쨌거나 이미 벌어진 일, 갈매기, 다이아몬드, 무궁화와 별들의 권고, 군대식으로 줄이자면 기껏해야 작대기 두 개 단 난 어떻게든 글을 이어야 한다. 그 전에, 연재 확정을 무기로 널 향한 내 미안함을 적어둔다. 네가 이 글을 볼 리 없어도 난 너에게 미안하다. 네게 경솔할 내용을 적지 않겠다고, 너를 욕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나의 글은 과거지향인의 실연의 서(書), 비감(悲感)은 오롯이 내 것이다.
검정치마, Antifreeze
이번 장을 이처럼 시작하는 까닭에는, 연재가 확정되며 자연히 독자들이 생겼기 때문도 있다. 많은 메일을 받았고 과분히 여긴다. 고맙지만, 곧 사그라들 관심이라 생각하는 게 내겐 편하다. 이에 그대들을 '내 몇 안 되는 독자들'로 부르려 한다. 양해를 구한다.
그래,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젊음의 전초기지에서 그대들이 얼마나 활약했을지 짐작이 간다. 내 얄궂은 사랑 얘기가 편력(遍歷)과 공명했다니 복되다. 찬사와 비난만 있었다면 나도 무뎌졌겠지. 나쁜 말이되, 흥에 겹거나 실의에 젖어 설아에 대한 죄책감 따위는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하나 메일 한 통이 내 허를 찔렀다. 그럴싸한 수사(修辭)로 은폐한 자책을 꿰뚫어본 한 대위님의 메일을 옮기는 편이 향후 내 운신의 폭에 이롭겠다. 난 아직껏 정당화하지 못한 본고의 음영이 그 분 덕분에 또렷해졌다. 박광민 대위님의 허락을 구하고, 받은 내용 그대로 옮긴다.
김진훈 일병에게
안녕하세요. 천안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광민 대위라고 합니다. '월간 공군'에 실린 "낭만적 작가주의"를 인상 깊게 읽어 몇 자 끄적여봅니다. 지위고하에 상관 말고 펜레터로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저도 소심하게나마 재야의 문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조금 쑥스럽지만, 이번 월간 공군 연재에도 응모했습니다. 당신의 글을 읽기 시작한 동기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겠죠. 하지만 제가 떨어진 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멋진 글들입니다. 경쟁률이 상당했을 텐데, 마음으로나마 축하를 전해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그것보다, 잘 쓴 글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당신의 글은 당연히, 제 생각에, 잘 쓴 글입니다. 동시에 무척 어렵기도 했어요. 이과 출신인 제 머리로는 이해하는 데 오래 걸리는 문장들이 많고, 그래서 오히려 더 좋다고 느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몰랐다가, 두 번째, 세 번째 편에 다다라 차분히 표현 하나하나를 곱씹으면서 읽으니, 자연스럽게 당신에게 제 감정이 이입됐습니다. 당신은 사랑이 아니라 이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둘의 처음을 읽어나가는 것이, 그런 사랑을 겪어본 적 없는 저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당신의 유려한 문체는 제 감정을 흔들었고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습니다. 저는 당신과는 반대로, 직관적인 문장들을 많이 쓰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글에 화려함이 없고 단조로워서 오로지 줄거리로만 승부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물론 제 잘못이 없진 않겠지만 한편으론 제 글쓰기 방식이 글을 못 쓰는 것과는 별개라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다 내려놓고 하는 말인데, 전 군 생활이 끝나면 작가로 등단하고 싶고, 세상의 인정도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당신처럼 문장을 써낼 자신은 없군요. 본인의 필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잘 쓴 글은 무엇인지 생각을 듣고 싶네요.
아무래도 '월간 공군'이 공군 전 부대가 공유하는 자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김 일병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은 과연 이것이 실화인가겠죠. 당신이 입장을 밝히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작가 지망생인 제가 봐도 '일람표'는 너무나도 현실적이었습니다. 놀라웠어요. 전 이 글이 어느 정도의 사실을 전제로 한다고 믿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느꼈을 만한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이 새삼스레 신경이 쓰였고요. 저도 글을 쓰는 사람이고, 글은 보통 필자의 경험에 기반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 글이 경험의 상대방에게 실례되는 경우도 흔하겠죠. 김 일병의 나이대가 그럭저럭 스물 넷이라고 한다면, 제가 5년 정도 선배이니, 원치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심심한 위로를 해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겪은 사랑이 진심으로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이 이 사랑은 반드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작가적인 마인드로 나아갔으며, 이번 연재뿐 아니라 앞으로 써낼 많은 글들이 지금과 일관된 주제의식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작가주의 정신을 가졌다면, 설령 유설아 님의 별다른 허락 없이 이 글을 적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이처럼 절절한 사랑 얘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건, 그분도 그만큼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니까요. 만약 당신이 그분에게 연락한다거나, 재회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시도했겠죠. 그게 아니라 이것이 당신 사랑의 최선이라면, 계속 써도 괜찮을 겁니다. 그녀에 대해 쓰는 미안함을, 소설 속에서 드러내는 그녀에 대한 미안함으로 이겨내세요. 당신이 죄책감을 겸허히 수용하고 나아가면 그분은 당신을 이해해줄 겁니다. 닿을 수 없는 마음을 그렇게나마 표현한다는 게 실로 아름다운 거니까요.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읽었던 책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성급한 충동보다는, 한 번의 용맹보다는, 결과로서 수용되는 지혜보다는, 면면한 기도(企圖)가, 매일매일의 약속이, 과정(過程)에 널린 우직한 아픔이 우리의 깊은 내면을, 우리의 높은 정신을 이룩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충동에 능하고, 우연에 승乘하고, 아픔에 겨워하며, 매양 매듭 고운 손 수월한 안거安居에 연연한 채 한 마리 미운 오리 새끼로 자신을 한정해 오지는 않았는지······."
이것도 저에게는 참 어려운 글이라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었습니다. 당신의 글을 읽고 문득 생각이 나 한참을 찾았는데,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이었어요. 주제넘은 참견일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당신의 글과 닮아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당신의 글을 두고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보내 봅니다.
당신의 사랑의 끝에 결국 이별이 있다는 걸 아는 채로 이 글을 기다려야 한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당신의 다음 번 사랑이 그 분과 같지 않더라도, 더 성장하고 완전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좋은 사람이 찾아오더라도 당신은 유설아 님을 잊지 못할 수도 있겠죠. 그런 추억이 있다는 것조차, 저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어서 힘을 내서 다음 편을 적어주세요. 한 명의 팬으로서 기다리겠습니다. 언젠가 사석에서 작가 대 작가로 만날 날이 온다면 좋겠네요. 기탄없이 얘기 나눠봅시다.
그럼 이만 줄이며,
울림이 있는 글, 응원하겠습니다.
대위 박광민
발신자: 공군 제2미사일방어여단 공보정훈실 대위 박광민, 2022. 04. 22. 21:35, 수신자: 공군 8779부대 일등병 김진훈
압구정역 가는 길, 열차 문밖으로 손을 흔드는 소녀와 굳이 속도를 맞춰 차창을 내리는 스포츠카 뒷좌석의 노인이 다르지 않듯이, 우린 제각기 다양한 곡절의 삶 속에 공통의 가치를 공유한다. 난 글을 잘 써서 쓰는 것이 아니다. 못 쓴대도 안 쓸 것 아니다. 공통의 가치에 닿도록 쓸 뿐이다. 기록만은 그게 될 것 같다.
동물원, 혜화동
설아야,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낭만적 작가주의"의 끝에서, 너와 재회할 수 없음에 슬퍼하지 않는 나와 네게 부끄럽지 않은 나를 함께 만날 수 있도록 사력을 다하겠다.
편집자 주
* 박광민 대위의 메일은 다음 두 자료를 직,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 현지훈 외, 인본주의자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 2022.
-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4쪽(밤의 긴 터널 속에서), 햇빛출판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