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기일이 지나고, 하릴없이 여름을 소진하자니 아쉬워 2학기 기숙사가 열리자마자 입소했다.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침대의 층수밖에 없었다. 첫날 하루종일 뒹굴거리니 둘째 날부터 견딜 수가 없었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밖에 나갔다. 열대야였다. 다시 들어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놀랍게도 설아였다.
- 야, 어디 가냐?
- 어, 유설아. 너 왜 여깄어.
- 연락 안 볼래? 나 올라온댔잖아.
- 다음 주에 온다며.
- 인간아. 일정 생겨서 오늘 온다고 얘기했잖아. 뭘 본 거야?
- 아 그래? 뭔 일정.
- 그건 알 거 없어. 근데 너 안 본 새 되게 부었다. 더 못생겨졌어.
사람 짜증나게 만드는 데는 국가대표다. 할 말이 없기는 한 게, 설아는 농활에서 본 뒤보다 더 예뻐졌다. 여자의 변신에는 끝이 없다지만, 설아는 끝도 없고 서사도 없어서 문제다. 뭔 애가 이렇게 뜬금없이 예뻐지냐고. 와중에 왜 일찍 올라왔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턱끝까지 올라왔다. 간신히 참고 있는데, 설아가 대뜸 물어왔다.
- 뭐야, 왜 벙쪘대. 너, 오늘 저녁에 뭐해?
- 오늘 저녁? 바쁘지.
- 왜 바쁜데?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위기일발이다. 당시 내가 생각한 답변은 크게 다섯 가지다.
A. 너도 바쁘다며.
B. 알 거 없어.
(B-1. 알 거 없어. 너도 안 알려줬잖아.)
C. 공부해야 돼.
D. 친구들 만나기로 했어.
E. 여자 만나러 간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답했다.
- 원피스One Piece 봐야 돼.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밤마다 기숙사 인근에서 마주쳤을 뿐이다.
한석규, 8월의 크리스마스
곧 효성이가 올라왔다. 회우(會遇) 기념으로 통닭집에서 생맥주를 네 잔째 마시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유설아가 등장했다. 물론 어디서 밥 먹냐고 물어보길래 답은 했지만, 진짜 눈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혼자도 아니었다. 학과 모임 같았다. 드문드문 남자들이 있었다. 설아는 날 보더니 수줍게 인사했다. 사람 많다고 또 내숭을 부리는 그녀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는 동시에, 미남의 합석 유무를 스캔했다. 다행히도 그런대로 붙어볼 만한 학우들이었다. 그런데 돌발 상황. 효성이가 갑자기 일어나 설아에게 다가갔다. 악수를 청하더니, 쾌활하게 웃으면서, "진훈이랑 룸메고 강의도 같이 들었는데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셋이 친해지면 좋겠다," 이러는 게 아닌가. 취기 때문이겠지만 얼굴도 벌게져서 아주 가관이었다. 원래 숫기가 없는 녀석이라 더했다. 난 너무 당황해서 한참 쳐다만 보다, 효성이를 불러 앉혔다. 그의 묘기에 주변 사람들이 눈동자를 굴려댔고, 설아는 뭐가 그리 웃긴지 날 쳐다보며 킥킥거렸다. 난 설아에게 얼른 가서 놀라는 투로 손짓을 해보였다. 설아는 혀를 메롱 내밀더니 고개를 홱 돌려서 반대쪽 테이블로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귀여운 줄을 아는 것 같았다. 내심 좋아하는 내 모습에 짜증이 올라 생맥주를 세 잔 더 마셔버렸다.
이튿날 효성이는 너무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난 기왕에 벌어진 일, 셋이 친해져보자고 했다. 효성이 핑계로 설아를 걱정없이 자주 보려는 속셈이었고, 녀석도 별 생각 없는 듯 보였다. 문제는 설아였다. 효성이랑 친해지는 걸 너무 좋아하는 눈치라 걱정됐다. 종종 나처럼 효성이도 설아와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듯했다. 물어보지는 않았다. 효성이는 내가 설아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어쩌다 보니 친구로 남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셋이 친해진 마당에 설아에게 반쯤 차인 일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설아와 효성이 덕분에 8월을 축제처럼 보내고, 9월이 되어 마치 전날 만난 것처럼 모두가 돌아왔을 때 동기들은 공부를 시작했고 전공 강의는 어려워졌다. 설아는 학술 동아리에 가입했고, 난 여행 잡지를 스크랩하는 취미가 생겼다. 효성이는 나처럼 늦은 밤에 돌아오는 날이 잦아졌다. 둘이 나누는 대화 주제에 연애가 실리기 시작했다. 녀석은 자꾸만 내게 왜 아직 혼자냐고 물었다.
윤종신, 동네 한 바퀴
효성이가 설아와 풋내길을 걸어가는 것을 본 건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9월 중순이었다. 가을이 코끝에 걸린 밤이었다. 난 기념관 너머 풋내길 끄트머리의 동산을 걷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가로수 너머로 효성과 설아가 나란히 올라가고 있었다.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퍽 다정해 보였다. 난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인사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 자칫 나의 구겨진 표정이 오발탄이 될 우려도 농후했다. 난 소리없이 계단에 걸터앉아 그들의 메아리가 흩어질 때까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노래를 들었다. 어떤 노래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세 곡 정도 듣고 기숙사로 들어갔다. 효성이는 해맑게 나를 반겼다. 얄미운 자식, 바지라도 입고 반기던가. 난 둘을 봤다는 언질 대신, 저녁에 무얼 했느냐고 물었다. 별일 없었다길래 그냥 그렇거니 해버렸다. 설아는 밤늦도록 내 연락을 확인하지 않았다. 난 착잡하게 잠들었다. 그러나,
-일어났어? 어제 집 가서 바로 자느라 연락을 못했네. 미안해.
이튿날 아침 설아의 문자는 정말, 정말, 정말이지······, 이상했다. 게다가 그 주 일요일 설아는 저녁을 먹자고 부르더니, 자기와 계속 친구하려면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밥을 먹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걸었다. 신중한 답변이 필요해서 난 고심했다. 설아와 친해진 지 반년께 최대의 난제였다. 다행히 머리가 비상하게 굴러가, 유수의 한국 드라마에서 학습한 대책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다음과 같았다.
A. (미안하다 사랑한다) 싫어. 차 세워 빨리!
B. (태양의 후예) 싫다면, 고백할까, 사과할까.
C. (쌈, 마이웨이) 하지 마. 너 그럴 때마다 내가 떨린다고.
D. (환상의 커플) 싫어. 짜장면 사줄 거냐?
E. (도깨비) 싫어. 너와 함께하는 시간 모두 눈부시니까.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 친구 없냐?
- 아니거든.
설아가 민망해해서 난 마지못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용, 잊혀진 계절
가을깨나 탄다는 사람들은 '잊혀진 계절'을 모를 리 없다. 근래의 청춘들은 혀를 빼물고 언제적 구닥다리냐, 날짜가 등장하는 노래는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가 세련됐다 말하지만, 우선 'September'가 '잊혀진 계절'보다 4년 먼저 나온 노래다. 같은 젊은이로서 10월의 31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잊혀진 계절'의 감동을 공유할 친구들이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다. 그날이 되면, 난 일부러 택시를 탄다. 해질 무렵부터 자동차 라디오에서 일제히 그 노래가 나온다. 가만가만 들으며 서울의 대교들을 하나씩 가 보는 게 매년 10월 31일마다의 내 소망이다.
2018년 10월 31일, 설아와 서강대교에 갔다. 해는 벌써 저물고, 강 양켠으로 자전거 탄 사람들이 달리고 있었다. 가로등은 사람들을 쬐고, 강은 그림자를 쓰다듬었다. 바람이 불어 설아의 흰 치마가 한들거렸다. 머리를 쓸어넘기는 그녀의 손이 내 어깨에 스쳤다. 설아는 줄 이어폰을 꺼내 한쪽을 내밀었다. 우린 아무 말 없이 '잊혀진 계절'을 듣고 또 들었다. 난 그녀가 가자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홍대에 데려갔다. 처음 설아와 단둘이 술을 마신 날, 마침 막차 시간이 연장돼서 우린 여유있게 놀았다. 가을이 입꼬리에 걸린 시월의 마지막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