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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Aug 20. 2024

첫눈의 첫 송이가 내게 닿을 확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벗어날 수 없던 너의 영혼

노리플라이, 여정



- 진훈아, 소개 받을래?

 11월의 첫날, 효성이의 물음은 느닷없었다. 회색이 짙은 저녁이었다. 낮게 깔린 얼룩덜룩한 하늘 아래로 우산 쓴 사람들이 지나갔다. 우린 후문의 어느 김치찌개집에서 반주(飯酒)를 하고 있었다. 그는 양푼에 포기째 익어가는 김치를 자르며 물었다. 난 짐짓 차분하게 술을 말며 답했다.

- 누군데.

- 내 고등학교 친구의 동기. 미디어학부.

- 자신 없는데, 내 얼굴 보여줬어?

- 어, 괜찮다는데. 너도 볼래?

 그때 난 여전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사진 속의 여자는 친구들과 해맑게 웃고 있었고, 감색 니트가 가을을 받아 짙었다. 설렘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설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넌지시 알린 내 마음을 반려했고, 난 그녀의 밥친구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로서 난 혼자였다. 가을이 오면서 설아는 더 예뻐졌고, 더 자주 마주쳤으며, 연락도 더 잘 했지만, 난 다가가지 못했다. 한 번 더 본심을 보였다간 그녀를 잃게 될 것 같았다.

 효성이에게 그간의 일을 좍 말할까도 생각했다. 우린 친했고, 설아와 셋이 친해지며는 절친해졌다. 효성이는 유쾌하고 멋진 녀석이다. 설아만 아니었더라면 그에게 의지했을 것이다. 난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 해볼까?

- 바로 얘기해?

- 잠시만, 떨리니까 좀 이따 하자.

 우린 거듭해서 잔을 부딪쳤다. 식당 모서리의 조그만 나무판자 아래에서 옛 노래가 흘러나왔다.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었다. 효성이가 나지막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어때, 80년대 대학생 같지 않아?

- 생긴 건 딱 그 시절이지.

- 허, 사돈의 남말이세요.

 내게 그 장면은 물방울이 전조등 불빛에 겹쳐 흐르는 차창을 바라보듯 아련하다. 같은 자리에서 수없이 다시 만난 시간에 겹쳐 효성이의 눈빛은 짙고 얼굴에는 주름이 졌다. 난 이내 술이 되어 발랄해졌다. 역시 은근하게 취한 효성이가 내 장단에 맞췄다. 그러다, 해가 다 떨어지고 열린 창틈으로 밤바람이 들어오는데, 문득 효성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었다.

- 너 언제까지 설아 좋아만 할 거냐?

 난 당황했다.

- 유설아. 너 걔 좋아하잖아.

- ······걔 좋아하는 게 나뿐이냐.

- 뭔 소리야.

- 너도 있고······, 또, 뭐, 많겠지.

- 어휴, 너랑 같냐······. 설아한테 얘기해. 소개받았다고.

- 해서 뭐해.

- 해 봐. 내가 해줬다고만 하지 마.

 무언가 깊게 가슴을 찔렀다.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산울림,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이후, 설아의 마음을 떠보려 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실망스러웠다. 효성이가 소개해준 사람과 밥을 먹었다. 설아가 혜화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난 만남을 작파하고 그녀를 찾으러 갔다. 그녀는 내 소개팅이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마냥 해맑은 설아가 미웠다. 난 의식적으로 설아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여행 계획을 잡았다.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한 달 동안 유럽의 6개 나라를 돌기로 했다. 스무 살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특별했으면 싶었다.

 지겨울 만큼 사라지지 않는 생각이 있다. 아무리 밀쳐도 꿈쩍도 않는 마음이 있다. 설아가 그랬다. 난 설아가 짜증났다. 설아 때문에 마음 고생하는 것도 싫었다. 설아를 안 좋아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설혹 그녀와 연애를 하더라도 힘들기만 할 거라고 믿었다. 날 좋아하지 않으면서 가까이는 두고 싶어하는 심리가 이해가 안 됐다. 그녀를 아직도 좋아하는,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생각하는 내가 한심했다. 난 매일 설아에게 졌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난 설아를 생각했고 그녀를 향한 마음을 재확인했다.

 가을의 절정이 지났다. 풋내길에는 낙엽이 쌓였다. 꼬리에 은행나무 이파리를 단 고양이들이 걸어다녔다. 낮은 서늘했고, 밤이면 칼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덤불을 흔들 때마다 유리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난 설아의 연락을 무시했다. 설아와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았다. 설아의 표정을 헤아리는 일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멀어지기로 했다. 난 나를 동정하지도, 설아를 걱정하지도 않았다.

 

 12월의 첫날, 첫눈이 왔다. 법학관 강의실에 앉아 있는데, 창밖에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어? 눈이다!

 한 학생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내 말하고는, 쑥스러운지 입을 가리며 두리번댔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은 카메라를 꺼냈고, 몇은 다시 교재로 돌아갔고, 몇은 계속해서 창밖을 바라봤다. 할아버지 교수님이 돋보기 안경을 벗고 창틀로 갔다. 눈은 첫눈답지 않게 세찼다. 교수님은 중얼거렸다.

- 이제야 왔구나······.

작년보다 늦은 첫눈이었다. 교수님의 어투가 나직해서, 뭔가 그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설아가 이걸 보고 나를 생각한다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가 통하면 좋겠다······. 그 앞에 설아가 서 있는 것처럼, 난 오랫동안 창문 너머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눈은 종일 왔다. 세상이 하얗게 변해갔다. 눈 덮인 거리를 지나 진주색 계단을 넘어 방에 들어왔다. 어깻죽지에 매달린 눈을 털었다. 바깥은 고요했다. 간간이 신난 연인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넘어왔다.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첫눈이 오는 날 종로서적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엔 그게 고백이었어요. 첫눈 오는 날 어디어디서 만나자······. 그 사람하고 첫눈 오는 날 만나가지고, 매년 첫눈을 같이 보고, 군대 간 3년 동안 잠깐 못 보다가 나와서는 다시 같이 보고······. 그러다 10년째 되는 날에 우리 이만 같이 살까 해서 결혼하고, 여러분 같은 자식 낳아서 키우고, 돈 벌고, 자식들 장가 보내고, 그렇게 그 사람이랑 35년째 같이 삽니다.

 여러분, 지금 저 눈을 보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뛰쳐나가세요. 가는 길에 장미꽃 하나 사들고, 지금 만나자고, 내가 가겠다고. 요새는 연락도 잘 돼잖아, 우리 땐 그렇지도 않았어. 가서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눈 맞으며 포옹도 하고, 광장에서 같이 눈사람도 만들고······.

 그렇게 사세요. 눈이 녹아도 그 기억은 남아요. 내 말 듣고 정말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젊음은 후회없을 겁니다. 여기서 내가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다 보면 결국 남는 건 그런 거니까.

 물론 이렇게 얘기해도 아무도 안 나갈 테니,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나가 노세요. 수업 다 째도 돼. 12월 1일에 첫눈이 왔다잖아.

이영제, 한국어 문법의 이해, 2018. 12. 1. 강의록



첫눈 온다. 중앙도서관 앞에서 만나자.

12월 1일에 첫눈이 왔다잖아······.


 설아는 교육관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을 테니까 문자만 보냈으면 만날 수 있었다. 그 쉬운 걸 왜 못했을까. 하물며 그 앞을 서성이기라도 하지.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지. 왜 이런 황금 같은 날을 허송하다 방에 박혀 있냐······. 후회가 밀려왔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효성이는 나가 노는지 자리에 가방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혹시 효성이가 선수를 친 건 아닐까 걱정도 됐다. 그런 낭만 따위는 꿈도 못 꿀 녀석이라고 속을 달랬다. 젖은 목도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 결정 몇 가닥이 숨을 다하고 있었다. 줄곧 바라봤다. 눈이 다 녹을 때까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알림이 울렸다. 무심하게 휴대폰을 들었다가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설아였다. 설아의 문자였다.

- 김진훈, 어디야? 기숙사지.

- 응, 왜.

- 잠깐 나올래? 눈 온다.

 겉옷, 목도리, 상태 스캔, 신발, 계단, 현관문, 그 앞에 서 있다가 뒤돌아보는 설아, 언제나처럼 길고 하얀 치마에 검은 구두, 긴 상아색 코트, 분홍색 비니와 검은색 캐시미어 목도리를 한 채로, 왼팔에 꽃다발을 안고 오른손에는 우산을 든 발그레한 숙녀를 만나기까지 단 1분도 걸리지 않았다. 12시간 동안 한 번도 멈추지 않은 눈은 그 1분을 가뿐히 넘겼고, 설아는 왜 뛰어왔냐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 설아의 우산을 대신 들어주었다. 우린 가로등 불빛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전신주에 부딪혀 가늘어진 눈이 우산 위에서 톡톡 튀었다.

 그때 생각했다. 먹고, 마시고, 놀고, 망설이고, 의심한 얘기는 다 미사여구다. 내 대학교 1학년의 서, 본, 결에는 언제나 설아가 있었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때 옛말은 아득하게

이정석, 첫눈이 온다구요



 그녀는 수줍게 꽃을 내밀었다. 내가 보고 싶었고, 나를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말했다. 첫눈은 어느새 그치고 있었다.




*본편의 배경화면은 이와이 슌지 감독의 1995년 作 '러브레터'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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