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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Aug 23. 2024

설아의 편지

  신청일: 2022. 05. 17. 대천해수욕장우체국/익일특급

                                  내용물: 카세트테이프 2본, 엽서류


보내는분

유설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70

3 5 5 - 8 4 2


받는분

일병 김진훈

충청북도 충주시 으뜸로 21

2 7 3 3 9




 진훈아. 잘 지내?

 이 이름을 적으려고 며칠을 고민했나 몰라. 한 번은 꼭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용기가 안 났어. 이렇게 갑작스레 보내는 것을 용서해.

 우리가 같이 있던 마지막 날 너는 말했지. 내가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고. 돌아가도 똑같이 날 좋아할 거라고. 난 분명 너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믿었는데, 그래서 헤어지고 얼마간은 오히려 후련했는데, 왜 갈수록 네 마지막 말들이 더 크게 남을까. 생각나지 않았던 좋은 일들도 자꾸만 마음에 걸리네.

 내가 더 강했더라면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꼭 네가 나에게 찾아올 것만 같아. 네가 나를 떠올리는 것도 같고. 넌 분명 내가 충분히 강하다고 말했을 거야.

 네가 숱하게 했던 첫눈에 반한 이야기, 사실 오랫동안 안 믿었어. 솔직히 나에게 너는 적당히 가깝게 지내면 나쁘지 않을 정도의 즉흥적인 사람이었거든. 내가 누군가를 첫눈에 반하게 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안 와닿았고. 근데 어느 날인가 네가 말을 걸고, 이상하게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더라. 문득 두려웠어. 만약 너를 좋아하게 되면 그게 나에게는 모든 것일 텐데, 너는 나를 그저 스쳐가는 많은 인연들 중에 하나로 둘 것 같아서. 그래서 더 툭툭 대했던 것 같아. 네가 처음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조차 지나가는 감정이려니 생각했어. 준비도 되지 않았었고. 너 그 즈음 나한테 꽤 다정했던 거 알아? 지금 생각하면 적응 안 될 만큼.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항상 웃는 네가 정작 혼자 걸을 땐 무척 고독해 보였다는 걸 모르겠지. 내가 보냈던 무수한 시선들을 짐작조차 못했겠지. 기껏해야 내가 알려준 건 네가 점점 좋아져서 연락을 기다렸다는 것뿐이니까. 근데 난 어쩌면 네가 흔들리는 동안에도 늘 너를 좋아했어. 여자 기숙사 앞에서 널 배웅하고는 뒷길로 올라가서 넌 잘 들어가나 몇 번이나 봤고, 네가 친구들 만나고 돌아가던 때 산책한다면서 기다린 적도 많아. 그때 같이 듣던 음악도, 길섶의 라일락도, 처음으로 꽃다웠던 내 스물의 계절도 아직 여전해. 가로수길 메타세쿼이아는 모리코네, 공원의 플라타너스는 브람스. 나 이거 친구한테 똑같이 써먹고 있더라. 놀랐어.

 네가 데려갔던 기념관 뒷편의 풋내길, 쪼그리고 앉아 팔 부딪치며 속닥거리던 돌계단. 기억나? 네가 아니라면 갈 일 없던, 그래서 이제는 가지 않는 곳들은 그새 얼마나 바꼈을까. 기숙사 언덕을 허문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혹시 들었니? 궁금하긴 한데, 그곳에서는 꼭 나도 스물 내지는 스물하나여야 할 것 같아서 차마 못 가겠어. 네가 아니어도 그쯤 어디에서 갑자기 효성이가 나타나서 그때랑 똑같이 말할 것 같아. 너 진훈이 좋아하는데 왜 안 만나냐고.

 이미 효성이가 다 말했으려나. 여러 번 물어봤거든. 효성이랑 너 얘기하다가 기숙사까지 같이 올라간 적도 많아. 누가 봐도 서로 좋아하는 것 같은데, 너도 나도 마음을 잘 못 터놓는다더라. 효성이 못 본 지도 오래됐네. 둘이 장난치던 모습이 가끔 생각나.

 난데없이 웬 옛날 이야기인지 의아하겠지만, 나에게 네가 어떻게 기억되는지 전하고 싶어서 적어봐. 우린 앞으로 더 멀어질 거고, 그렇게 어른이 될 테니까. 또, 좋은 말들을 남기고 싶었어. 정말 끝맺어야 하는 시간이잖아. 너는 진작에 그랬던 것 같아. 헤어지던 날 내게 했던 좋은 말들 하나하나가 실은 너의 끝맺음이었어. 내가 너무 늦게 알아차렸지. 미안해. 그리고 늦었지만, 그동안 고생했어. 고마웠다.

 추억이야 밤을 새워도 헤아릴 수 없으니, 적어도 이것만 알아주면 좋겠다. 네가 추억으로 담은 것들이 나에게도 같아. 네가 생각하는 것들을 나도 생각해. 만약 시간이 우리 마음대로 흐르고 네가 나를 잊지 않아서 다시 한 번 그날들을 걸을 수 있다면, 아팠던 시간까지 행복하자. 많이 웃고, 나누고, 응원하고. 하지만 시간이 늘 앞만을 허락한다면 어쩌겠니. 따라가야지. 대신 너도, 나도, 다음 번 사랑은 모처럼 멋지게 해 보는 거야.

 나는 잘 지내. 너도 잘 지내고 있을 걸 알아. 많이 변했겠지만 그대로일 것 같아. 라일락 덤불에서 찾은 테이프랑 예전에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같이 보내. 너에게 중요한 물건이고, 네가 내 화 풀어준다고 고생한 날이니까. 동물원 8집도 같이 잘 간직해줘. 편지를 쓰면서 마지막으로 듣고 있어. 우린 꼭 '우리 이렇게 헤어지기로 해'의 가사처럼 흘러가는구나.

 그래도 이렇게나마 적으니 조금 편해진다. 서로를 좋은 기억으로 자연스레 잊기 위한 과정처럼 읽히기를 바라. 이제 정말 작별인사할게.

 진훈아, 함께여서 좋았어. 잘 지내.



환하게 깊은 밤

진훈에게, 유설아




*위 내용은 '낭만적 작가주의'의 원고를 설아에게 보낸 뒤, 그녀의 부탁으로 싣습니다. '물속에 남긴 발자국'에서 언급되는, 유설아가 김진훈 일병에게 보낸 소포의 송장과 편지 전문입니다. - 편집자 주

*9화는 '낭만적 작가주의'의 마지막 편으로, '여름이 좋아지려면 당신이 있어야 해요'로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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