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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Aug 22. 2024

물속에 남긴 발자국

그리고 바다는 모래 위를 지우지

자크 프레베르, '고엽.' 박웅현의 "여덟 단어"에서



 설아는 우리의 이야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지친다. 그래도 힘들진 않다. 사실 일관(一貫)이 없었을 뿐 난 이미, 자주 설아를 생각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낭만적 작가주의는 그간의 정리 작업이자, 이별에 관한 내 의무를 다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사랑을 기록할 의무를 가지는 건 그 사랑에 부자유한 자들뿐이다. 그건 무의식 속에 자리잡아 자유로운 기록마저 사랑에 귀속시키고 만다. 기록은 감정의 형식화(形式化), 형식의 자유 위에 감정의 부자유가 있다. 얼음이 풀리는 강(薄氷)에 귀를 기울이면 따스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나는 언 강처럼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설아를 만나 사랑하는 동안, 내 가슴패기에 흐르는 건 얼음이 아니라 물이라는 걸 알았다. 물은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설아는 언젠가부터 내가 달라졌댔다. 헤어지던 날에는 사랑하지만 너무 힘들다고도 했다. 그 말들을 이해하며 그녀를 떠나올 때 내 가슴은 다시 얼어붙었다.

 설아는 초속 1.6m의 남실바람, 그 여린 숨결이 그리워진다.


 설아는 날 완전히 잊었을 수도, 아직 생각할 수도 있다. 꿈 속에서, 나와 설아는 해질녘 어느 초등학교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매양 그랬듯 내게 팔짱을 끼고 머리를 어깨에 기댔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물들어, 노을은 깃털이 검붉게 젖어 있었다. 난 그때 설아에게 많은 걸 물어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어떤 흔(痕)도, 어떤 적(跡)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후로 먼 산의 수채화를 읽어나가다 보면 간혹 설아가 날 그리워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글쎄, 내가 준 아픔과 그녀의 마지막 말들 속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느낌이다.

 해묵은 추억으로, 몇 번의 꿈자리로 넘겨짚을 만큼 나도 여유롭지 않다. 난 차라리 깊디깊은 밤에 홀로 머문다.



서글퍼도 그대가 있어 눈부신 시간을 살았지

이문세, 슬픔도 지나고 나면



 비가 많이 왔다. 원색의 봄, 퇴근길의 노을마저 안쓰러워 보일 만큼 따가운 하루였다. 난 어김없이 설아를 떠올렸다. 저 어스름 건너편에는 설아가 사는 동네가 있을 것이고, 한때 우리가 함께 걷던 성주산로를 그녀는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설아가 나를 잊지 못했다는 느낌이 강렬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정도 저녁이면 내가 떠올라도 놀랄 게 없다고. 내일이면 다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테고, 웃고 떠들 일이 넘쳐날 것이며, 그중 한 가지는 위로가 되어 날 잊을 거라고······. 그 어느 "오래된 거리"에서 설아는 나를 잠재운다. 난 깨지 못할 꿈을 꾸며 그녀를 그리워하나, 그녀는 금세 일어날 것이다.

 이튿날, 내가 설아를 생각하던 개화기의 들녘에는 밤새 못다 핀 새순들이 옹송그렸다. 팔레트의 물감을 덜어내듯 비가 왔고 새벽을 거닐며 인상파의 영혼이 초록을 그려내었다. 식당 건너편의 후미진 담장 너머로 흰 꽃이 피었다. 그것이 아몬드나무인지, 살구나무인지, 햇귀를 늦게 받은 매화나무인지, 사실 모른다. 다만 아몬드나무라면 조금 슬프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날, 설아에게서 소포가 왔다. 그  안에는 개화예술공원에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과 두 장의 카세트 테이프-동물원 8집과 전람회 2집, 그리고 무명빛 편지봉투가 들어 있었다. 난 그 사실을 사무실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다. 택빈, 종화, 동재, 동균, 민규, 유민을 비롯한 그들은 이 낭만적인 여정의 숨은 조력원이었다. 난 그들에게 또 하나의 고민을 남긴 셈이다.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이해를 바라며, 이 편지의 내용 전부는 밝힐 수 없다. 내 글이 허구가 아니라는 게 그대들을 흥미롭게 했겠지만, 그 대가로 난 전보다 더한 자책 속에 산다. 최인훈의 광장을 빌려 말하면, 덧입힐 수 없이 소중한 기억은 결국 누구에게도 내보일 수 없는 법이다. 편지만은 내 최후의 보루로 여겨주길 바란다. 언젠가 내가 설아와 다시 만난다면, 혹은 내 운명의 끈이 끊어져 여기가 아니고서야 그 편지를 보존할 데가 없다면, 그날까지 이 글이 살아 있고 설아도 읽게 된다면······, 그땐 달리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궁금해할 부분 약간을 적어본다.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다고 믿으며, 일단 재회를 바라는 편지는 아니다. 나의 행복을 비는 것도 아니다. 그래, 나만의 행복은 중요하지 않다. 그대들은 나와 설아의 결말이 함께 행복하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설아의 소포를 받은 직후에는, 첫눈 오던 그해 겨울처럼 설아가 또 한 번 기적을 일으키는 줄 알았다. 마침 성주산로를 떠올린 담날 개화예술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받다니. 운명 같은 우연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뜯었다. 다 읽고, 외워버릴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읽고 깨달았다. 우리에게 행복이란 결말이 아니었으므로 난 행복도, 결말도 자신할 수 없다는 것을. 각자의 행복을 빌어주는 순간 우리의 행복은 영영 잃어버리게 된다는 걸 설아는 알았다.

 설아가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만도 충분히 기적이다. 이 글을 읽을 리 없어도, 내가 그녀를 무척이나 그리워한다는 걸 설아는 알리라 믿는다. 내가 설아에게 답장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내가 답하면 그녀가 힘들어진다는 것까지도 이해한다. 가없는 사랑의 바다를 빠져나오되, 우리가 물결에 하염없이 그렸던 발자국을 기억하는 설아에게 진심으로 고마울 뿐이다.



골목길 외등 바라보며

김민우, 사랑일 뿐야



 사랑이란 운명적으로 불완전한 감각이다. 이별의 시기는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이다. 우리는 그중 무엇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내가 한없는 어둠 속을 헤맬 때, 몸 누일 곳 하나 없음을 뜨거운 탄식으로 알아챌 때, 이 맘에 그녀가 살아 숨쉬고 있음이 날카롭게 짚어지고, 그렇게 어느 불후의 가객이 젊음의 끝자락에서 생을 마감하듯 우리의 청춘은 가눌 틈 없이 스러져가지만, 좀처럼 늙지 않는 사랑은 선명한 아픔으로 우리의 가슴 속에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내가 설아를 생각하던 개화기의 들녘에는 어느새 아카시아가 휘황하게 배어난다. 별들이 꿈결처럼 어른거리는 짙푸른 밤이 날 들여다보듯 가만가만 흐른다. 저 멀리 끄트머리가 그을린 달이 걸려 있다. 그 어둠의 손끝에서 초속 1.6m의 남실바람이 분다. 물결째 음각(陰刻)되어 언 강에 당도한 두 발자국에 바다가 잠들어 있다.




*본 화의 "오래된 거리"는 다음 자료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청혼, 문학과지성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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