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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Nov 21. 2020

어딘가로

  10분 후에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탑승구 앞으로 하나둘씩 줄을 섰다. 넓은 유리창 밖으로 가까이에 선 여객기와 느리게 이동하는 노란색 전동차들이 보였다. 좀 더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줄 선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나서도 나를 위한 자리는 남아 있을 것이다. 이미 오래 기다려 온 나는 곧 떠난다.  

  탑승권을 들고 연결 통로를 걸었다. 공항과 비행기 사이를 잇는 통로를 지날 땐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활주로 공중에 난 단순하고 단단한 길은 불안할 게 없다. 낮에는 햇빛이 쏟아지고 밤에는 환한 조명으로 가야 할 곳을 안내하는 길을 똑바로 걷기만 하면 됐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들뜬 발걸음을 조용하게 했다. 진정된 마음으로 승무원에게 고개를 숙여 맞인사를 나눈 후 통로 쪽 좌석에 앉았다. 편하게 화장실을 오가기 위해 고른 좌석이었다.

  창쪽 좌석에는 이마에 반다나를 두른 여성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가운데 자리는 비어있었다. 좌석은 예상보다 좁았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승무원이 여성을 도와 선반에 캐리어를 집어넣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이가 재잘거리고 있었다. 정면으로는 줄지어 앉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가 보였다. 짧은 갈색 머리와 내려앉은 긴 금발 머리가 나란히 있었다. 움직임을 보니 두 머리의 주인들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하겠습니다.”

  테가 얇은 안경을 쓰고 남색의 폴로셔츠를 입은 중년의 남성이 나를 지나쳐 가운데 좌석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은 후 나와 그, 창쪽의 여성은 잠시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우리는 그대로 긴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대신 그는 내게 간단히 인사하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그는 영어로 말했다.  
  "어느 좋은 곳으로 가시나요?"

  “저는 말레이시아로 가요.” 

  나는 잠깐 생각하고 답변을 했고 그는 미소를 띠었다.

  “제가 사는 나라군요. 좋은 곳입니다. 무슨 일로 가나요?”

  우리는 말레이시아의 문화와 날씨, 가볼만한 관광지에 관한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다른 여행지에 대한 도 오갔다. 나는 특히 라오스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연말에 라오스의 작은 마을에 있었어요. 1월 1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사람들과 밤하늘에 풍등을 날리기도 했죠.”

  그는 아주 장관이었겠다면서 말레이시아에서도 비슷한 축제가 열린다고 알려줬다. 그곳에 가면 라오스에서만큼 즐거울 거라면서. 그랬다. 라오스의 밤은 정말 춥고 아름다웠다. 수백 명이 날린 풍등이 별처럼 빛났다. 그리고 그날 나는 아주 외로웠다. 라오스에서 지내는 내내 혼자였지만 그때만큼 외로운 적이 없었다. 사람은 나누고 싶은 생의 한 순간에서야 혼자임을 쓸쓸해한다는 걸 그날 알았다. 나는 힘들 때보다 기쁠 때 더 누군가와 함께이고 싶었다. 선물 받기를 기대하진 않아도 선물을 건넬 사람이 없다는 건 쓸쓸했다.

  중년 남성은 곧 창쪽에 여성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눈인사를 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비행기가 느리게 움직였다. 객실 앞에 선 승무원이 안내방송에 따라 비상구의 위치와 벨트 매는 법, 구명조끼 사용법을 몸짓으로 설명했다. 비행기가 크게 원을 그리며 회전할 때 즈음엔 중년의 남성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서로 기대고 있는 갈색과 금발 머리를 보며 눈을 감고 생각했다. 어디로 갈까. 원숭이가 담벼락을 넘나들고 사람들이 등을 태우는 해변으로 갈까. 뜨거운 고기 육수와 물방울이 맺힌 맥주를 파는 곳으로 갈까. 거대한 석상이 반쯤 감긴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곳, 길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는 골목길로 가자. 한 번도 가지 못한 곳, 누군가의 옆자리로.

  비행기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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