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 Nov 25. 2020

피를 봅니다

  거울을 봅니다. 야윈 얼굴이 있습니다. 턱뼈가 발달돼 야위었어도 넓어 보이는 얼굴입니다. 볼살이 없어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입니다. 눈썹은 바깥으로 갈수록 두꺼워집니다. 눈은 옆으로 길고 완만한 곡선을 그립니다. 눈꼬리도 깁니다. 눈동자는 갈색입니다. 코의 경사는 완만하다 가팔라집니다. 오른쪽 콧구멍 위에 점 하나가 있습니다. 인중과 턱밑, 귀밑으로 희미한 수염자국이 나있습니다. 아랫입술이 윗입술보다 두텁습니다. 머리카락은 진한 갈색입니다. 이건 그의 젊은 얼굴입니다. 늙은 그의 얼굴은 살이 붙고 넓습니다. 볼살이 조금 쳐져있습니다. 회색 눈썹이 바깥으로 갈수록 두꺼워집니다. 그의 눈동자가 검은색이었을까요. 누렇게 변한 흰자위만 기억납니다. 어떤 코를 가졌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네요. 팔자 주름이 있습니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은 흰색과 회색, 검은색이 섞여 있습니다. 병원에서 본 그의 모습입니다. 그는 살이 불어 있었습니다. 그와 작별인사를 나눴던 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요. 그날은 저와 어머니, 동생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 날이었습니다. 어린 저와 동생은 놀이터 근처에 있는 그의 반지하방으로 가 문을 열었습니다. 낮이었는데도 깜깜한 방에 그가 앉아 있었습니다. 잘 가라. 그가 말했습니다. 그날 이후 십 년이 지나 저는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는 그를 만나 키를 쟀습니다. 저는 키가 더 커 보이려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습니다. 그때 목발을 짚고 일어선 그에게서 저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이후 다시 십 년간 그를 몇 번 더 만났습니다. 한동안 그는 그저 늙어가는 한 남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배가 나오고 머리카락이 하얘졌습니다. 그러나 언제서부턴가 그는 추락하는 남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병원 응급실에 연락을 받고 달려간 그곳에서 그는 금속 틀에 양손이 묶인 채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누런 눈은 붉어져 있었습니다. 손목에 붕대가 감겨있었습니다. 사람은 늙으면 약해집니다. 그는 너무 약해져서 몸과 마음에 병을 얻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그와 헤어진 우리의 탓이라고 점점 더 끈질기게 주장했습니다.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몸속에 암세포를 키우고 한쪽 다리를 절고 직업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습니다. 그 요구는 요새 들어 점점 더 협박의 어조를 띠고 있습니다. 저와 동생의 결혼식에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동생은 약간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제가 밀고 나갔습니다. 환희의 순간에 비를 몰고 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는 검고 축축한 사람이 됐습니다. 닿으면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기는 오물 같습니다. 그건 증오나 슬픔의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반지하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손을 내민 사람까지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갈 실패의 찌꺼기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는 동생은 흠잡을 곳 없이 찬란해 보여서 저는 제 결정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저도 어머니나 동생의 장례식장에선 그를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슬픔의 검은 옷이 그의 흔적을 덮어주기도 할 것입니다. 장례식장에서 그를 만나는 상상을 합니다. 상상의 장례식장에서 그와 저는 항상 싸웁니다. 저는 보지 않아도 그가 가까이 왔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그와 마주하고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봅니다. 그가 조용히 절을 하면 저도 조용히 절을 하고 그가 목소리를 높이면 저도 소리를 지릅니다. 그가 난동을 부리면 저는 온몸으로 그를 막아섭니다. 그와 피를 봅니다. 몸부림치는 그를 눌러 제압합니다. 그의 몸 위에 올라섭니다. 그에게 밟힙니다. 그와 함께 쓰러집니다. 그의 등에 업힙니다. 그게 그와 마지막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주고받음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딘가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