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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씨 Sep 09. 2023

우울한 일기

  예전에는,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고도 나는 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다. 꽤 구체적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헛된 바램정도. 현실은 내 꿈을 이루기에 수준이 높았고 생각보다 까다로왔고 나는 내가 생각한만큼 능력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외면하고 있던 사실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고 침대에 누우면 '넌 못해', '과거를 후회해' 따위의 잡생각들이 꼬리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적은 급여를 받아도, 옳지못한 대우에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기까지인가보다'하는 스스로의 한계를 정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작은 실수에도 '내가 그럼 그렇지', '왜 나는 이 사소한 것을 놓쳤을까'하는 부정적인 사고에 사로잡혔고 '나는 이것도 못하는 사람이구나'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처음에는 나를 탓하는 생각들로 가득차고 그 후에는 남들과 나를 비교했다. 심지어 외모도 평가했다. 뚱뚱하고 못생겼다. 남들처럼 예쁜 구석도 없는데 내가 누구처럼 예뻤다면 삶이 좀 편했을까, 누구처럼 몸매가 좋았다면 행복했을까. 멍청한 생각들은 사라질줄도 몰랐다. 잔잔한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는 갈대처럼 멈추는 방법도 몰랐다.


  출근을 하면서 차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벼운 접촉사고부터 입원하는 상상까지 했다. 출근을 '안' 할수는 없으니 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매일 아침 그렸다.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허벅지를 때리거나 팔을 긁었다. 손등을 쥐어파기도 했다. 다리에 멍이 들거나 팔에 빨갛게 상처가 생기면 어쩐지 위안이 되었다. 고양이 발톱에 긁혀 피가 철철나도 기분이 좋았다. 거의 매일 밤을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 울거나 웃거나 시끄러웠다. 주변에 관심이 없어지고 사람들과의 대화가 귀찮아졌다. 다른 사람과 마찰이 생기면 화가 났고 그 감정은 컨트롤되지 않았다. 퇴근을 하다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듯이 퇴사를 했다. 이사도 했다. 이사를 하면서 매일 새벽3시에서 4시쯤 잠이 깼고 쉽사리 잠을 자지 못했다. 불쾌한 악몽도 꿨다. 누군가 내 집에 들어오려 하거나 밖에서 훔쳐보는 내용이었다. 술을 진탕 마시면 많이 잘 수 있었지만 숙취가 따라왔다. 3개월동안 제대로 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게 불면증으로 정신과에 방문하였고 설문지를 작성하였고 상담을 받았다. 상담결과 불면증보다는 우울증이 심각한 상태였다. 사라지고 싶다거나 죽고 싶다는 생각은 보통 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자 횡설수설하며 말을 꺼냈다. 말을 하면서 설움이 복받쳤다. 기대했던 선물을 받고 정신없이 포장지를 뜯었는데 고장난 장난감을 받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왜 하필 고장난 장난감이었는지. 나는 머릿속에 정리된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다. 선생님은 특별히 날 위로하지도 않았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수긍하며 공감해주는 짧은 대답에 눈물이 났다. 


  생각해보니 나는 나에게 한 번도 '그럴 수 있었겠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달리다가 넘어져도 다시 달리다가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가라앉을 때마다 '그럼 그렇지'하는 비난을 했다.


  6개월 동안 약을 먹으면서 부정적인 생각은 차오르지 않았다. 딱히 우울하지도 딱히 행복하지도 않은 보통의 상태가 지속되었다. 생각이 줄어드니 전보다 잠은 잘잤다. 생각이 줄어드니 주변에 관심이 갔다. 내 방, 집 주변의 풍경, 사람들과의 관계, 내가 좋아했던 영화, 요즘 재미있는 예능프로그램 등. 


  약을 먹지 않아도 상태가 유지되었다. 지금생각해보니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살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득했다.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때 나는 뒤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었던 셈이다.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며 기회를 놓쳤던 일들을 후회했다. 


  다시 시간의 정방향에 섰다. 머물러 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부지런히 나아가야한다는 조급함은 있지만 서두르지는 않겠다. 조금은 미뤄가며 현재를 살아가야겠다. 지금은 새로운 직장에 이직을 했고 인수인계를 받고 있다. 의욕이 넘치지는 않지만 안정되고 있다. 짧아진 하루를 느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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