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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씨 Sep 22. 2023

밤을 걷는 이유

평소 '빚을 졌다'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고마움을 느끼거나 미안함을 느끼는 등 마음이 참을 수 없이 요동치면 꼭 빚을 졌다라는 생각이 따라왔다. 그것은 낯선 사람에게도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갚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꽤 오래전부터 그랬다. 살면서 실수를 반복하고 잘해내고 싶은 마음은 앞서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해내지 못했을 때,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빚'에 대한 강박은 커졌다. 그것은 곧 내가 잘 살아서 갚아야지, 어느 날 로또가 당첨되면 꼭 그들에게 돌려줘야지, 하는 터무니없이 이룰 수 없는 상상을 만들었다. 나는 겨우 하루를 버텨낼 뿐인데 오히려 '빚'이 땔감이 되어 일상의 불씨를 지펴준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싶다가도 '그래도 잘 살고 싶다.' 라는 희망이 스물스물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마저 버거워질 때가 온다. 실수라는 이름도 더 이상 써먹지 못할 때, 고마움을 가벼운 혓바닥 위에 올려 인사만 건넬 때. 왜 이렇게 '빚'을 더 만들어버리고 말까.


생각이 많아지고 주저 앉고 싶을 때, 나는 밤을 걷는다. 밤은 소란스럽지 않고 여유롭다. 푸르스름한 구름이 떠 있는 하늘, 청초한 달빛, 간간히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나지막한 주홍빛 가로등, 대화하며 천천히 걷는 사람들... 나는 조용히 밤 속으로 들어가 컴컴한 어둠에 몸을 맡기고 다시 조용히 나온다. 밤의 여유로움은 고민의 색을 빼앗고 고요함의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흠뻑 밤을 적시면 개운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시 '빚'을 갚기 위해 열심히 한 번 하루를 살아내는 것. 어쩌면 타인에게 맞춰진 삶이라 오해를 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내가 살아나가니까. 마음대로 끝을 그릴 수 없도록 오래오래 살아가야하니까.

아무튼 같이 살아가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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