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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훈이 Mar 31. 2017

열한번째, 부암동 프레이야

지금은 사라진, 소중했던 공간

빵집 : 프레이야 (*영업을 종료한 곳이에요. 기억하고 싶어 쓰는 글입니다.)

위치 : 부암동 세검정

메뉴 : 제철 과일, 제철 식재료를 이용한 각종 디저트, 쉐프님의 창의력이 빛나는 샌드위치







부암동. 반듯하게 잘 닦인 도로가 북악산까지 쭉 이어져 서울 드라이브 명소로 사랑받는 동네.

물론 정직하게 뚜벅이 인생을 걸어온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디저트 가게, 프레이야가 생기기 전까진.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등장한 빵집 프레이야. 알록달록한 색감과 상상을 초월하는 재료조합으로 빵순이/빵돌이들의 SNS를 뜨겁게 달구더니 급기야 예약하지 않으면 맛보기 힘든 곳이 되었다. 부암동 한 가운데가 아니어서 선뜻 나서기 쉽지 않았지만, 늘 그랬듯이, 오직 빵집 하나를 위해 버스에 올랐다.

지하철을 한참 타고, 버스를 환승해서 도착한 세검정. 이름도 생소한 이곳에는 조용한 마을과 우체국, 작은 상점 몇 개가 전부여서 ‘정말 이런 곳에 디저트가게가 있을까?’ 싶었다. 조금 걷다보니 다행스럽게도 아담한 하얀 대문과 커다란 유리에 적힌 “Freyja”라는 글씨가 나를 맞아주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6명이 앉을 수 있을까 싶은 테이블 하나와 이미 예약으로 텅 빈 트레이들. 할머니댁에서 본 듯한 오래된 서랍장 두어개. 그리고 커튼 너머 아기자기한 주방이 전부였다. 빵과 사장님, 몇몇 손님만을 위한 작지만 충실한 공간.        









 프레이야는 오전 11시 SNS에 업데이트 되는 메뉴를 확인하고 예약하면 되었는데, 그 날은 오전 9시부터 무작정 문자를 드렸다. 메뉴의 생김새도 몰랐지만 이름에 의지해 디저트를 골랐다. 전날 밤 다음 주를 끝으로 영업을 종료하신다는 갑작스런 이별 통보를 받고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탐나는 메뉴를 보면서도 멀다며 방문을 미뤘는데 불현 듯 헤어짐이라니.     



 햇살은 뜨거웠고 거리는 여전히 멀었으며 집에서 나오자마자 시작되어 프레이야 앞에 다다를 때까지 이어졌던 엄마와의 통화로 나는 많이 슬펐지만, 그래도 가야만 했다. 영업일은 4일 남았지만 주말 인기를 극복할 자신이 없으니, 이른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느즈막한 오후가 되어 프레이야의 문을 열었다. 텅 빈 트레이와 평소보다 조금 빈 듯한 서랍장. 프레이야의 유일한 테이블엔 아무도 없었고 출입문으로 들어오는 후덥지근한 공기와 도로 위 자동차 소리가 나와 함께 머물렀다.





 자리를 잡고 예약해 둔 접시를 받았다. 늘 그랬듯이, 계절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긴 플레이트.




여름을 대표하는 자두와 천도복숭아가 들어간 상큼한 타르트, 팥과 녹차의 만남이 마치 녹차 빙수를 연상케 하는 녹차 티라미수. 그리고 지난밤 내린 비로 성큼 다가온 가을을 맞이하는 듯한 곶감대추스콘. 지난 봄이 담긴 쑥 치아바타도 사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예약이 누락되어 있었다. 아쉽지만 – 나대신 다른 누군가가 맛볼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이 날은 먹기 전 유독 여러 번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포크를 가져다대지 못했다. 과일과 팥+녹차, 어떤 것부터 먹을까 고민하다 과일이 마르기 전에 복숭아 타르트를 먼저 먹기로 했다.



상상이상으로 향긋한 천도복숭아와 부드러운 크림, 쿠키 같은 타르트지와 고소한 아몬드 크림도 좋고 사이사이 들어있는 자두가 상큼한 포인트였다. 그야말로 여름을 붙잡아 둔 청량한 타르트. 사라지는 게 아쉬워 녹차 단팥 티라미수도 맛본다.






조금 달겠거니 싶었는데 생각만큼 달지는 않았다. 탄탄해서 신기했던 말차 시트와 알알이 살아있는 통팥 앙금, 부드러운 마스카포네 치즈크림, 그리고 쌉싸름한 녹차 가루. 생각만큼 녹차 맛이 진하진 않았는데 한데 어우러지는 느낌이 참 좋았다. 중간중간 짭짤함도 느껴지는 단짠 법칙에 충실한 티라미수 타르트였다. 마지막은 묵직한 무게와 존재감을 뽐내는 호두가 인상적인 곶감대추스콘. 그간 먹어 본 프레이야의 디저트들이 꽤나 달았기에 스콘도 달 거라 예상했는데, 단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스콘이었다. 곶감의 은은한 단맛이 전부인 깔끔한 스콘.  





 모든 메뉴가 그리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트를 비우기까지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린 것 같다. 모든 음식을 세월아 네월아 먹는 성격도 한 몫 했지만, 그 날은 오래오래 맛을 간직해야 했으니까.    





 배가 차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에 있는 서랍장엔 매번 제철 맞은 과일과 채소가 가득했었는데, 이 날은 아오리 사과 몇 개와 감자 몇 알, 단호박 한 통이 전부다. 그나마 있던 미니 단호박은 다음날 디저트로 탄생할 예정인지 쉐프님과 함께 주방으로 사라졌다.         




에어컨이 꺼진 실내는 덥고, 아이스커피의 얼음도 다 녹았고, 나의 접시도 텅 비었지만 – 어쩐지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추수의 계절- 가을이 되면 달콤한 디저트에 올라갈 재료가 쏟아져 나올 텐데. 프레이야의 가을을 보지 못해 그저 아쉬울 뿐이다.  






 돌아오는 길. 가을의 한 가운데에 있는 듯 파랗고 높은 하늘과 푸르른 녹음은 분명 아름다웠는데, 나는 어쩐지 슬펐다. 오고 가고를 반복하는 계절처럼, 언젠가 프레이야도 다시 돌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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