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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훈이 Dec 11. 2017

나이 많은 신입사원 일기 - 대학 동기

서로를 잘 모른다 하더라도








그렇게 친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이였다.


100명이 넘는 신입생들을 5개의 클래스로 나누어 몇몇 수업을 함께 듣게 했던 그 시기,

옆 자리도 같은 조도 아니었던 우리는 그냥 대학 동기이자 클래스 메이트. 그 뿐이었다.


학교 근처에 거주하며 학생회를 했던 나와 달리,

그녀는 장거리 통학, 아르바이트, 연애 등으로 대학 시절을 보내며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공통 분모가 없으니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고 서로를 알아갈 기회도 없었다.






학년이 높아지며 편입, 휴학 등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각자의 진로를 탐색해가기 시작했고

시류에 따라 나와 그녀도 각자의 삶을 꾸려가기 바빴다.

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서, 학생 식당에서 스치듯 인사만 주고 받는 게 전부인 사이였다.




그런 우리가 다시 만난 건 - 런던에서였다.

도서관도 학교 앞 카페도 술집도 아닌, 먼 나라 영국.






사건은 이랬다.

휴학을 한 나와 달리 칼졸업을 하고 런던으로 어학연수 겸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그녀.

그곳에서 운좋게 직장을 잡았고, 영국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난 취업 준비를 하다말고 유럽 여행을 떠났는데, 어쩌다보니 런던 in - 로마 out이라는 일정이었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런던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나는 그녀가 떠올랐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출발 전 메세지를 보냈고, 그녀는 기꺼이 나를 만나러 런던으로 와주었다.

왜였는지는 역시 잘 모르겠다.



영국에 머문 5일 중, 우리는 이틀을 함께 했다.

어색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서로를 알게 된지 5년 만에 처음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같이 쇼핑을 하고 야경을 보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지며 가끔 속에 담긴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받았다.

좋아하는데 한국에 없어 못 먹는다는 한 마디에 그녀는 고디바 생 딸기 초콜릿 한 봉지를 턱하니 사 주었고

타워브릿지가 열리는 풍경이 보이는 야외 테라스에서의 저녁식사,

디저트를 좋아하는 나를 위한 애프터눈 티 세트도 전부 그녀가 계산했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 그녀는

'나는 여기서 돈을 벌지만 런던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쓸 일이 없어서 괜찮아.

 나중에 취업하고 나 한국가면 맛있는 거 사줘' 라고 말했다.

있는 돈 없는 돈 긁어 모아 떠난 배낭여행이었기에 정말 눈물나게 고마운 순간이었다.

대답 대신 나는 한국 음식 중 무엇이 가장 먹고 싶냐고 물었고, 그녀는 소곱창이 먹고 싶다 했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오면 - 내가 꼭 소곱창을 대접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녀는 한국에 한 번 정도 들어왔던 듯 했지만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그 때 까지도 나는 백수였어서 만나자고 할 엄두가 안났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돈을 벌기 시작한 나는,

전 세계 각지로 출장을 다니는 그녀의 sns에 용기내어 댓글을 달았고 그녀의 입국 소식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왕래가 뜸한 사이였지만 왠지 설레고 반갑고 떨렸다.

드디어 마음의 빚을,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중은 못 나가더라도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해 마음이라도 전해야지 싶었는데 요 몇 주간 너무 바빠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밥과 일, 잠이 삶의 전부였던 정신없던 나날들이었고 주말에도 떨어진 체력이 올라오지 않아 주저 앉고 싶은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삶을 핑계로 나는 또 다시 그녀의 방문에 무관심해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빵집으로 혼자 숨은 일요일.

간만에 들어간 sns에는 그녀가 보낸 다이렉트 메세지가 있었다.

'000-0000-0000 핸드폰 번호 이거 맞아? 나 오늘 저녁 비행기타는데 필요한 거 없어? 저번에 보니 러쉬 좋아했던 거 같은데 사다줄게'

일주일 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터질 뻔 했다.


아마도 그녀는 모르겠지만, 한 주 동안 들었던 말 중 가장 따뜻하고 위로가 된 말이었다.

오래 전 바뀐 핸드폰 번호를 다시 알려주고 설레는 마음으로 화장품을 골랐다.

그리고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소곱창 집을 검색하며 생각했다.




우리가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했던 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을까.

그냥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인데, 알아보려 하기도 전에 단정 지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친하지 않다'라고 선을 그었던 건 내가 아니었을까.




오늘 밤엔 아무리 피곤해도 영국 여행 사진을 봐야겠다.

그녀와 어딜 갔었는지, 무엇을 먹었었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며 재회를 준비 해야겠다.





소곱창을 먹고난 후에는 요즘 꽂힌 바도 데려가줘야지.

문득 한국이 그리워질 때 나와 함께한 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이번엔 내가 많은 것을 해줘야지.









이러려고 스트레스 받아가며 돈 버는 거 아니겠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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