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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훈이 Sep 18. 2017

나이 먹은 신입사원 일기 - 3,6,9 고비

한 번씩 찾아온다는 전설의 3,6,9 고비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3/6/9 고비가 있다고 한다.

3개월, 6개월, 9개월 혹은 3년, 6년, 9년 주기로 찾아온다는 위기.


신입의 경우에는 일에 어느 정도 적응함에 따라 처음 가졌던 패기나 열정을 잃는다는 거고,

오랜 시간 한 곳에 머문 베테랑 직원들은

일에 대한 권태감과 짜증, 분노, 우울 나아가 무력감 등을 느끼며 퇴사를 꿈꾸게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였다.



한동안은 3/6/9 고비에 대해 잊고 살았는데, 진짜 존재하는 건가 싶다.

물론 나는 입사한 지 9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입이니 전자에 해당할 것이다.



얼마 전, 그러니까 8개월에서 9개월로 넘어가던 시기-

사수님께 좋지 못한 피드백을 받았다.

업무적 퍼포먼스와 태도, 두 가지 모두 아쉽다는 이야기였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던 내용이었지만

막상 귀를 타고 들어오는 그 말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당시 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업무,

설득 한 번 해 볼 수 없는 나의 위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야 하는 답답함에 위가 아팠고

"그런 일" 때문에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짜증이 머리 끝까지 차 있었다.


워낙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나이니,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수님이 눈치 못 챘을 리 없었고

업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몇 차례 불꽃이 튀기도 했었다.

(이 날은 나 스스로도 놀라긴 했다.)


사수님도 참다 참다 꺼낸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나는 신입이고 막내이고 뭐든 배워야 하는 시기니까.





그래서 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끄집어내어 다시 하고, 한번 더 확인하고, 될 때까지 하고-

일 - 밥 - 일 - 밥 - 일 - 잠이 삶의 전부가 되며 3주 내내 야근을 했다.

힘들어 죽을 거 같았는데 오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어찌어찌 결과물이 나오고 있고, 사수님께 '요즘 변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상해졌다.

부모님과 통화를 하고 나면 죄책감에 눈물이 날 정도로 감정 컨트롤을 하지 못해 아예 전화하기를 포기했다.

그 피곤함에도 허구한 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평일엔 아무것도 안 먹고 싶다가 주말에 좋아하는 것들 혹은 술을 몰아 먹는다.

살 용기도 없으면서 명품 가방, 스카프, 신발을 매일 같이 들여다본다.



무엇을 위한 변화였고 누구를 위한 노력이었을까.

매달 말일 통장에 찍히는 금액이 주는 행복감은 3일밖에 안 가던데.

모처럼 서울에 온 부모님께 식사를 대접하고 홀로 돌아오던 길은 그렇게도 외롭던데.

'요즘 변했다'라는 피드백이 주는 뿌듯함은 하루도 못 가던데.



오만가지 생각이 들지만 참기로 했다.

입 밖으로 꺼내면 실행에 옮길 것 같아 아무말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가을이니까,

유독 가을에 약한 나니까 그런 거겠지.

9개월에서 10개월로 넘어가면 괜찮아지겠지.

잠이 오지 않는 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내 마음도 나아지겠지.


지금은 이렇게 믿는 거 이외엔 다른 방법을 모르겠다.









원래는 일 하면서 느낀 것들, 좋은 것들, 뿌듯했던 것들을 기록하고 싶었는데

하필 이런 시기에 브런치를 시작해서 불평이 많은 글이 되어 버렸다.

속상한데 -

내일이 월요일이고, 여전히 잠이 오지 않는 게 더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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