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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훈이 Oct 25. 2017

나이 먹은 신입사원 일기 - 제안서

잘한다 잘한다 자란다




생각을 장표화하는 능력이 아직 부족한 나이기에

제안서 장표를 만드는 일은 큰 부담이자 스트레스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만든 제안서가 클라이언트에게 넘어갔다.


기존 제안서에 업데이트되는 부분이라 분량은 적었고

그마저도 대리님의 피드백과 추가 수정을 거쳤지만,

분명 뿌듯하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대학 시절 수많은 팀 프로젝트 과제를 수행하며 PPT를 안 만들어 본 것도 아닌데,

학교와 회사는 분명 다른 것이라.

대리님과 사수님이 아무렇지 않게 척척 해내는 그 일이 나는 몸을 베베 꼬아가며,

밥도 넘어가지 않아 약간의 당분으로만 버텨가며 몇 시간을 매달려야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오전에 갑작스럽게 잡힌 아이디어 회의였다.

나의 실력과 성격을 알고 계시는 대리님께서는

무심한 듯 친절하게 장표 한 장 한 장에 담겨야 할 내용을 설명해 주셨지만,

나는 점점 사색이 되었고 영혼은 이미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혼자 먹는 점심시간임에도 즐겁지가 않았다.

요즘 위장이 안 좋아 죽을 택했는데 그마저도 체할 것 같았고 위산이 역류하는 듯했다.


어찌어찌 죽 반 그릇을 비우고 나의 버팀목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에게 하소연을 하며 한 바퀴 걷고 나니 마음이 좀 정리되는 듯했다.


그리고 시작된 PPT 만들기.


뭘까.

어쩐 일인지 오늘은 조금 달랐다.

여전히 몸은 베베 꼬였지만 평소보다 막히는 부분도 없었고 중간중간 재밌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주어진 데드라인은 7시였는데 마무리하고 시계를 보니 5시였다.

'오, 생각보다 빨리 끝냈는데?'라며 놀라시는 대리님을 보니

죄송한 마음 반, 뿌듯한 마음 반이었다.

스피드 왕인 대리님께 그동안 내가 어떤 이미지였는지 확인할 수 있었달까. 허허



이어서 피드백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수정 사항이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처음 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일찍 끝낸 덕분에 수정사항도 내가 만져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힘들었지만 좋았다.


제안서 수정 중간 훅- 들어온 다른 업무의 피드백을 듣고 화장실 가서 눈물 좀 쏟았지만,

그래 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도와줄 거 없어요~~?'라고 묻는 사수님이 얄밉긴 했지만,

수정을 다 끝내고 파일을 전달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메일함에 NEW가 떴다.

대리님께서 최종 마무리 후 클라이언트에게 보낸 메일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열어 본 첨부 파일은 내가 작업했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몇 개의 이미지와 표현이 수정되어 있었다.


와씨 뿌듯해.



윗분들이었다면 3시간이면 끝냈을지도 모르는 일을, 일부러 내게 기회를 주기 위해 시키셨다는 걸 안다.

피피티 머신인 사수님 눈엔 할 말이 많은 장표였겠지만, 일부러 아무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더 감사하고 마무리 지은 내가 기특하다.





들어갈 내용을 다 짚어 주셨으니, 어떻게 보면 다 차려놓은 밥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숟가락질도 해봐야 할 수 있고 젓가락질도 연습이 필요한 게 아닌가.


오늘 수저를 사용해 봤으니

내일은 밥이랑 반찬도 내가 떠볼 수 있겠지.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틈엔 밥도 짓고, 나물도 무치고, 찌개도 끓이고.

엄마처럼 갈비찜도 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

오늘은 딱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아 벌써 9시다.

집에 가면 늦은 저녁을 먹고 아껴 둔 파운드케이크를 먹으며 이 기분을 만끽해야겠다.

이제부터는 내일 제출 예정인 컨텐츠를 만들어야 하니까^^








나 크고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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