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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훈이 Nov 12. 2017

나이 많은 신입사원 일기 - 나이 어린 사수

나의 그분은


나의 사수는 나보다 한 살 어리다.

참 이마저도 나이 많은 신입 다운 것 같다.

심지어 그는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학생이다.

오랜 시간 이 회사에서 인턴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시절을 보냈고,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여전히 사랑받는 막내의 이미지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하고, 민망한 것도 부끄러운 것도 많은 내게 사수님은 꽤나 어려운 존재였다.

다른 성별, 어린 나이, 직장에서의 오랜 경험, 언제나 직진인 성격, 기계 수준의 일처리 능력,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는 무표정까지-

그래서일까.

초반 몇 달간 우리는 일적인 대화 이외에 거의 나누지 않았고 그마저도 메신저를 통해 주고받았다.





당시 인턴이었던 나는 정규직에 대한 생각보다는

하루하루 적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지라 그게 이상하다는 것도 몰랐다.

사수님과 퇴근 후 맥주 한 잔 하는 건 나의 오랜 꿈이었지만 이상하게 말을 꺼낼 기회가 없었고

그럴 용기도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첫 회식 자리에서 사수님은 나의 그런 점에 대해 서운함을 표현했다.

사적인 대화는 거의 없고 주어진 일만 하고 가버린다는 것,

개인적인 성향인 건 이해하지만 너무 벽을 치는 것 같다는 게 대략적인 내용이었다.

당연히 모두가 우리 둘의 대화에 집중했고, 술이 확 깸과 동시에 민망함이 밀려왔다.

숱한 고민의 시간을 보내고 나는 용기를 좀 더 내어보기로 했다.



출근 전 쿠키도 하나 올려놓고, 말 한마디 더 걸어보려 괜히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늘 음악을 듣는 사수님께 노래 신청도 해봤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흐르고 몇 차례 행사 준비, 제안서를 쓰며 실제로 우리는 꽤 가까워졌다.

알고 보니 나이 어린 나의 사수님과 나는 꽤나 비슷한 성향이었다.

그래서인지 조금 친해진 이후 우리는 서로를 갈구는(?) 사이가 되었다.



조용한 듯 차분하지만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나와, 늘 얄미운 말을 던지는 사수님.

술이 좀 많이 들어가면 내게 반말을 던지는 사수님 ^^...(그래도 내가 누나인데..)



이제는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재밌다는 사람도 있고 둘이 합이 잘 맞는다는 소리도 듣는다.

어색하게 인사만 나누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참 신기하다.

처음엔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선배님 소리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래서 oo님이라 부르다가 지적을 받기도 여러 번이었는데 지금은 선배님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둘 다 술을 좋아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술을 진탕 마시며 인간적인 면을 알아가는 것도 좋고,

업무 중간 커피 한 잔 사 마시며 바람 쐬는 시간도 좋고,

서로의 안목과 아이디어를 신명 나게 까다가도 어느 순간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도 재밌다.



나의 실수가 대리님 귀에 들어가기 전에 함께 무마해 주시는 것도 감사하고,

머신이라 불리는 사수님이 어쩌다 한 번 하는 실수를 몰래 수습해 가는 과정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나의 직속 선배님을 보며 참 많이 배우고 느낀다.

일 하나하나를 처리해 가는 과정이 게임 같아 재밌다는,

내 기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자꾸 하시지만

업무에 임하는 태도나 일 처리 속도, 스케쥴링 능력 등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하도 휴가를 안 쓰셔서 나도 괜시리 못 쓰게 되는 건 좀 슬프지만

이렇게 워커홀릭일 수도 있구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여하튼 배울 게 많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사회생활에 있어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거다.

철저히 입사 순서가 서열을 결정한다는 건 어찌 보면 슬픈 일이지만,

그동안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나는 얼마나 많은 선생님들을 지나쳐왔을까 -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나이 어린 사수님과 나는 종종 서로의 퇴사일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물론 아직 현실성은 없고 우스갯소리로 주고받는 이야기지만,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선배님 퇴사하시면 저도 나갈 거예요. 그러니까 꼭 미리 말씀해 주세요."

삶에서 관계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나이기에 이건 진심이다.





회사 생활을 버티게 하는 큰 버팀목 중 하나인 나의 나이 어린 사수님.

아 요즘 자꾸 혼자만 간식 먹는다고, 얼마나 좋은 사수를 만났는지 알아야 한다고 찡찡거리시는데-

내일은 내가 아끼는 쿠키 하나 책상에 올려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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