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닮은 사람

당신이 떠오르는 그 계절이 왔어.

by 일훈이


9월 한 달을 일만 하며 보냈던 탓일까.

유독 겨울이 빨리 찾아 온 기분이다.

지난 봄 드라이클리닝 해서 넣어 둔 트렌치코트를 아직 입지도 못했는데

어느덧 코 끝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

내가 유독 약한 겨울이 온 게 실감난다.



당신이 생각나는 계절, 겨울.






봄인 줄 알았는데 다시금 겨울이 온 듯 했던 날.

매서운 바람에 정신 못 차렸던 그 날을 기억한다.

남자 사람 하나, 여자 사람 둘.

너무나 건전했던 우리의 밤을 기억한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가 환히 내려다 보이던 - 그 집을 기억한다.




야식 거리를 사러 가던 길.

바람이 차다며 외투를 내어주던 당신을 기억한다.

내 평생 다시 입어볼 수 있을까 싶은 값비싼 외투.

가격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내어준 것이어서 더 포근했던 것임을 알고 있다.




두근거리는 마음이 들킬까 괜시리 어두운 밤 거리를 도도도도- 달려다녔던 나를 기억한다.

부랑자가 많아도 함께여서 무섭지 않았던 그 밤이,

아직도 선명하다.



한인타운의 중화요리 전문점에서 탕수육 하나를 포장하고,

그리웠던 소주도 한 병 사고,

집 앞 슈퍼에서 맥주를 한아름 샀던 순간의 설렘을 기억한다.

술 마실 생각에 신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함께 보내는 우리의 밤이 나를 설레게 한 것이었다.




플레이트 매트를 깔고 식기를 가지런히 세팅한 후,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음식을 접시에 담아내던 당신을 기억한다.

도자기 그릇에 나무수저가 부딪히며 내던 둔탁한 소리를, 나는 잊지 못한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까지 잠들지 않았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창 밖으로 내려다 보이던 빅애플의 야경 덕에

조명이 어두웠음에도 결코 어둡지만은 않았던 그 밤은,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선명하다.



코 끝 시린 계절이 되어 그 브랜드의 패딩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

나는 어김없이 당신이 보고 싶다.

그때의 내가, 언제까지나 내 것일 줄만 알았었던 것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







겨울, 봄, 여름을 함께 보냈지만,

당신은 나에게 겨울이었어.


당신이 차가웠다는 게 아니야.

도톰한 남색 패딩과 김 서린 유리창에 그렸던 자그마한 그림이 남긴 기억이

추운 날씨를 잊게 할 만큼 따스한 것들이어서,

세 번의 계절을 함께 했음에도 당신은 나에게 겨울로 남았어.


날이 차다.

당신이 생각나는 그 계절,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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