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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Oct 04. 2022

알 수 없는 존재와 공존하는 법

까칠한 운전자와 심술궂은 차, 카오디오

어린 시절 즐거운 기억의 중심엔 차가 있다. 주말마다 자주 여행을 떠나던 그때,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이나 차창 사이로 넘나드는 바람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그 무성의 장면에 음소거 버튼을 해제하는 순간, 분위기는 삽시간에 바뀌어 버린다. 문제는 바로 음악이었다. 청국장 향이 풍길 것만 같은 구성진 멜로디가 뒷좌석으로 넘어올 때마다 폴폴 날아다니는 내 기분에 그 눅눅한 냄새가 들러붙을까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때론 귀에 이어폰을 쑤셔 박기도 했지만 마지막 방어선마저 뚫고 들어오는 노랫소리에 내 세계가 자꾸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앞자리로 옮기고나서부터는 움츠렸던 세계를 쭉 펼 수 있었다. 


온전히 내 취향을 반영한, 나만을 위한 음악이, 나를 둘러싼 공기에 가득 울려 퍼진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사 없는 재즈음악, 어쿠스틱 인디 음악, 약간 빠른 템포의 팝송, 일명 탑골 가요까지. 취향껏 음악을 가득 담은 ubs를 꽂는 순간, 차 안을 가득 채우는 울림이라니. 그래, 이거지! 차가 이동식 노래방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몸치든 음치든 상관없었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앉아서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관절을 사용해서 둠칫 둠칫 리듬을 타고, 아는 노래든 모르는 노래든 죄다 따라 불렀다. 


마음껏 소리쳐도, 신나게 리듬을 타도 되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거리의 수많은 존재들 속에서 나를 분리시켜주는 그 느낌이 좋았다. 내 몸과 큰 틈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나를 감싸고, 내가 가는 걸음마다 함께 하는 기분이 제법 좋았다. 나만의 캡슐이 나를 지켜주는 것만 같은, 아늑하고 내밀한 감각이 좋았다. 이 맛에 운전하는구나! 싶었다. 물론 이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내 올드 빈티지카가 굉장한 변덕쟁이에, 예측 불가능한 심술쟁이란 사실을 잠시 잊었다.


나를 들썩이던 음악이 멈췄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조작 화면도 먹통이 되었다. 운전을 하는 큰 기쁨이자 동반자였던 음악을 들을 수 없다니! 카오디오 주변의 누르거나 돌릴 수 있는 모든 버튼들을 눌러보았다. 다행히 라디오는 나왔다. 카오디오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눈물을 머금고 손수 고른 플레이리스트를 포기했다.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어볼까 했지만, 폰으로 네비를 보는 나로선, 네비의 목소리 안내까지 전부 들어야 하는 나로선 무리인 선택지였다. 무엇보다 블루투스 연결이 안 되는 내 차에서 듣는 핸드폰 음악은 매력이 떨어졌다.  


음악이 없는 운전은 공허했다. 나를 감싸던, 나만의 세계가 빛을 잃고 사라진 기분이었다. 시동을 거는 동시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무너진 내 세계를 비집고 들어오는 라디오 소리는 성에 차지 않았다. 치지직 거리는 소리도 거슬리고, 음악 대신 채워지는 DJ의 목소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내가 고르고 채운 세계가 아니었으니까. 알 수 없는 차의 변덕에 뾰로통해진 얼굴로 핸들을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노래가 튀어나왔다. 응? 도대체 넌 뭐니? 음악이 다시 나오는 건 좋았지만, 제 멋대로인 차에 당황스러웠다. 원인 모를 문제도 답답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해결도 시원하진 않았다. 언제라도 다시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인 건 여전했으니까. 수리를 하러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빠르게 접었다. 오래된 차에 얼마 나올지도 모를 수리비를 들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택한 대안은 cd였다. 집 정리를 하다 구석에 처박힌 cd더미를 발견한 덕이었다. 그래, 올드 빈티지카에는 usb보다 cd지! 예전에 즐겨 들던 cd 몇 장을 챙겼다. 제 멋대로 음악이 나왔다 말았다 들쑥날쑥했던 usb에 비해 cd는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cd 한 장 당 열 곡 남짓한 음악밖에 들어가 있진 않았지만 옛 추억에 잠기기엔 딱이었다. 게다가 차 안은 그런 추억에 잠기기 꽤나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그 즐거움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cd를 바꿔 들으려고 새로운 cd를 넣는데, 조금 뻑뻑한 느낌이 들었다.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뭐 별일 있을까 안일한 마음으로 cd를 쑤셔 넣은 게 화근이었다. 음악이 나오질 않았다. 심지어 다시 cd가 나오지도 않았다. 차가 cd를 먹어버린 것이었다. 하다 하다 이젠 cd까지? 대체 넌 얼마나 손을 봐야 하는 거니. 참 많은 관심과 손길을 필요로 하는 내 차. 하지만 나는 살뜰한 보살핌보단 새로운 적응을 택했다. 


음악 대신 라디오 속 사연에 '어머어머' 맞장구를 치기도 했고, 마음에 드는 음악을 찾아 이리저리 주파수를 옮겨다니기도 했다. 아이패드로 팟캐스트를 틀어놓기도 했다. 나의 무관심에 지쳤는지 어느새 usb음악은 안정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원인은 알지 못했지만 그저 차의 상태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 너는 그렇구나. 그럴 수 있지.


 까칠하고 예민한 나는, 알 수 없는 변덕을 부리는 존재와 함께 지내면서 이해하지 못해도 인정하는 법을 배워간다. 어쨌든 심술궂은 차를 운전 아니, 모시고 다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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