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만난 사람 풍경
궂은 날씨 탓에 밖을 오래 볼 수 없었던 배 안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역시 방 안 사람들이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3인 가족! 보송보송한 피부와 앳된 걸음은 등장부터 단연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이의 몸과 손에 지닌 모든 게 작았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진지하게 끄적이더니 못생긴 그림을 '최대한 예쁘게 그린 거'라며 엄마 얼굴 옆에 가져다 대는 모습이 풉- 새어나오는 웃음을 자아냈다면, 동생의 핸드폰에서 커져가는 게임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며 동생에게 귓속말을 건네는 오빠의 속삭임은 흐뭇한 미소를 만들었다. 아이가 만들어낸 지우개 가루가 날릴까 꼼꼼하게 털어내는 엄마의 손놀림도, 퐁퐁 넘쳐오르는 에너지를 주체 못하며 오가는 아이에게 슬쩍 던지는 낯선 이의 무해한 농담도 바다 위를 순항했다.
이방인이 건네는 다채로운 풍경은 바다 건너 도착한 섬에서도 계속 되었다. 그 장면을 펼쳐준 무대는 바로 숙소였다. 내가 예약한 공간은 쉐어 하우스에 가까웠는데 함께 머물고 있는 주인 부부와 스태프, 거주자 1명을 모두 대면한 건 5일째 되는 날이었다. 근처 중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한 덕이었다. 평균 이상의 낯가림 탓에 조금은 어색한 공기가 걱정되었지만 함께 있던 친구 덕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다행히 주인 부부가 노련하게 대화를 이끌어 갔다.
사실 내가 이곳 숙소를 예약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들 부부 때문이었다. 세계여행을 하고 제주에 내려와 물질하며 살아간다, 그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콘텐츠가 아닌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로망을 모두 실현하고 있는 그들이 궁금했다. 어떤 시간을 지나왔고, 어떤 마음을 품었으며, 어떤 생각으로 이런 삶을 살고 있는지. 물론 그 모든 것을 묻진 못했다. 처음부터 상대의 세계에 불쑥 들어가는 게 내겐 익숙한 일이 아니었기에. 급작스러운 침범으로 그들이 당황하거나 불쾌해하진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대신 그들이 스스로 꺼낸 이야기 조각을 맞춰보았다. 이집트 여행, 그곳 빈민가에서 만난 고양이를 입양하고 아픈 강아지를 돌보며 매일 제주를 달리는 일상. 책과 함께한 카페를 꿈꾸고 반려 동물이 생을 마감하는 어느 날, 제주 살이를 잠시 접고 다른 곳을 떠날 미래... 조금은 여유롭고 약간은 치열한, 꽤나 용감하고 제법 멋진 그들이 더 궁금했다.
그날 이후 더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목과 거실에서 펼쳐진 이야기 속에서 그들이 사는 제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가령, 제주는 실제로 날씨가 좋은 날이 거의 없다는 진실이나 그들이 날씨 예보 중 유일하게 체크하는 것이 '풍속'이라는 것, 그럼에도 제주 날씨는 예보가 아닌 '통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날씨 외에도 높은 낙찰가보다 '동네지인'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끈끈한 지역 커뮤니티나 '고모'들이 축하 메시지를 걸어둘 정도로 흔한 현수막 문화까지. 일개 관광객이라면 절대 알 수 없는 깨알 재미들을 전해주었다.
한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세밀화를 더 좋아하지만 다채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크로키도 좋아하는 내게 카페는 꽤나 흥미로운 공간이었다. 일단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이 제주시에서는 멀리 떨어진 서귀포시의 남쪽 끝단이라는 점도 한몫했던 것 같다. 프랜차이즈를 피해 동네 카페에 가면 일단 어느 샌가 시끄러움이 밀려왔다. 분명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노트북을 펼쳤던 것 같은데, 이것저것 딴짓을 하다 본격적으로 키보드를 누르려 할 때쯤이면 금방 엄청난 활기가 카페 안을 가득 채웠다. 물론 서울이라면 굉장히 불쾌했을 순간이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제주 아닌가? 어느 곳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진귀한 네이티브의 방언을 생중계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다.
시끄러운 이방의 언어와 소란이 익숙해질 때쯤 오일장에 들렀다. 말을 섞으면 반드시 사야할 것만 같은 강박 때문에 쉬이 말을 건네지 못한 나지만, 함께 있는 친구 덕에 조금의 두려움을 내려놓았다. 둘이면 살 수 있는 게 두 배가 될테니까. 시장 초입부터 꽈배기를 하나씩 입에 물고 떡볶이와 튀김을 해치우고, 사과와 달걀 한 판, 오메기 떡과 빙떡(얇게 부친 메밀 or 옥수수 안에 양념한 무를 넣어 말아낸 것)을 샀다. 수줍고 간결한 대화 탓인지 에누리 따윈 없었지만 카라향 몇 개를 덤으로 얻기도 하고, 맛보기로 과일 몇 조각을 얻어 먹기도 했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걷던 시장 거리가 생각났다. 바삐 걷는 엄마 손에 끌려 가면서도 눈동자는 시장 간식에 고정하면 다섯에 한번쯤 옛다-하는 눈빛으로 손에 쥐어 주던 간식의 짜릿함이나 '남는 게 없다'는 뻔한 거짓말을 넣다 뺏다 하며 슬쩍 하나 넣어주던 덤의 훈훈함이 흐르던 비좁은 거리. 자유로운 손으로 카트를 끌며 널찍한 공간에 마련된 시식코너을 오가는 마트에서는 좀처럼 그런 정겨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심심한 안부나 진부한 거짓말이 생략된 채 그저 물건과 사람 간의 상호작용만 있을 뿐이니까. 사과를 잘라 건네는 주름진 손과 방언이 묻어나는 자부 섞인 설명이 넘치는 오일장이, 숙소가, 제주가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