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간 워케이션, 보름 간 제주 살이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만,
이번 워케이션은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한 둘이 아니었고, 그걸 해내려면 에너지 충전을 위한 혼자만의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모든 계획은 전부 무너져버렸다. 생각보다 지인의 방문이 잦아 제주에서 온전히 홀로 보내는 시간은 고작 일주일 남짓. 게다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람들과 연을 맺어버렸다. 누군가와 닿았다면, 그때부터 나만의 세계는 조금씩 금이 가버리기 마련. 그 틈새로 새로운 사람들이 스며들었고, 점점 그들이 만들어가는 세계가 확장되었다. 그 첫 시작은 아이스크림이었다.
"혹시...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스태프가 다음 지인의 방문을 위해 내 방 침구 커버를 교체하는 동안 잠시 열린 문 틈 사이로 수줍은 말이 들어왔다. 앞 방 손님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 달콤한 유혹을 어찌 떨칠 수 있겠느냐만은 꼭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따스한 마음이 녹아버릴까봐 아이스크림을 냉큼 받아들었다.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어 머리를 굴리던 나는, 타로를 떠올렸다. 다행히 그녀는 매년 몇 번씩 보러갈만큼 타로를 좋아한다고 했다. 우리는 당장 타로를 펼치고 그 주변에 둘러 앉았다. 타로의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타로를 좋아하는 이의 눈동자가 커지는 만큼, 타로를 처음 뽑아본 이의 입이 벌어지는 만큼 나도 신이 났다. 잠시 지나치던 사장님도 앉아 타로 카드를 뽑아 들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갔다. 그날의 내 계획은 다음날로 미루었다.
'혹시 김치전에 막걸리 드실래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시나리오 작업을 마감하고, 오후 소설 원고를 수정하기 전 쉼을 갖던 차였다. 딱히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심심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달걀을 삶고 라볶이를 막 돌린 참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태프의 문자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하필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결국 타로 대신 김치전이 지글대는 프라이팬에 둘러 앉았다. 김치전을 생전 처음 부친다는 스태프는 반죽의 되기와 굽기 정도를 다채롭게 시도했고, 덕분에 우린 다양한 모양의 김치전을 맛볼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나오던 막걸리를 반 정도 비웠을 때 다시 타로 카드를 펼쳤고, 사온 술을 거의 비울 때쯤 빗소리가 희미해졌으며, 아이스크림과 젤리 따위로 안주가 바뀌었을 땐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그만 놀고 먹고 싶었습니다만,
모슬포 삼시 세 끼를 찍었던 그 이틀 중 어느 쯤이었을 것이다. 가파도 이야기가 나온 건. 누구의 입에서 먼저 나왔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가파도에 가자고 했다. 주말을 꼬박 놀았으니 이제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쯤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 된다'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김치전을 얻어 먹은 감사의 의미로 그날의 식사를 함께 대접 하기로 했기 때문. 게다가 이 시즌이면 가파도 청보리가 유명할 때였고, 위치 상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아침 일찍 마감을 하고 점심 식사 겸 다녀오지 뭐, 라고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는 가파도 행 배에 올랐다. 전부 매진된 상황에서 거의 반 제주도민이 된 스태프 덕에 겨우 구한 귀한 티켓으로.
청보리가 넘실대는 가파도는 아주 작고 아기자기했다. 쉼없이 오가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제외하면 평온만 남을 동네, 여행객의 설렘과 생활인의 루틴이 오묘하게 뒤섞인 공간이었다. 여린 초록빛을 발산하는 청보리는 놀러온 이에겐 사진 배경이 되었고, 일상인에겐 생계수단 중 하나가 되었다. 청보리 핫도그, 청보리 아이스크림, 보리 뻥튀기, 청보리 김밥, 청보리개역 등등... 놀라운 건 우린이 모든 걸 먹었다는 사실! 심지어 일찍 일어나 마감을 하느라 아침까지 챙겨먹었던 나는 점점 배가 차올랐다. 하지만 한 사람이 결제하고 1/n로 나누는 상황에서 계산을 복잡하게 하는 것도, 가깝지 않은 사이에서 괜한 불편함을 주는 언행도 삼가고 싶었기에 'No'를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음식을 삼켜냈다.
모두 배가 불렀기에, 김치전에 대한 감사로 대접하기로 한 식사는 저녁으로 조금 미뤄두기로 했건만... 이게 웬걸! 옆집에서 무를 잔뜩 주셨다며 무를 손질하던 사장님이 무전을 부쳐주시는 게 아닌가. 배가 불렀지만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놓칠 순 없지! 무를 얇게 채 썰어서 부쳐내는 요리였다. 감자채전에 비해 바삭하진 않았지만 부드럽게 사각거리는 식감 안으로 달큼한 무즙이 여리게 퍼지는 매력이 일품이었다.
"저희가 사드리기로 한 거 이따 사드릴게요."
허기는 잠 재웠지만 그렇다고 배가 차지는 않은 스태프가 햄버거 가게를 검색하자, 앞방 투숙객이 말했다. 생각해보면 그날 먹는 음식은 전부 간식이긴 했다. 문제는 '저희'에 포함되는 나는 배가 고프기는커녕 매우 불렀다는 것. 하지만 상황은 나의 마음과 달리 부풀어 올랐고, 결국 사장 부부까지 모두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메뉴는 족발. 그리고 배가 차지 않은 누군가로 인해 피자 한 판까지 더해졌다. 물론 그들과의 식사도, 시간도 즐거웠다. 하지만 위장은 음식으로 넘실댔고, 머리는 '아, 일은 언제 하지'로 가득찼다. 소화도, 내 작업도 시급했다.
우도에 가고 싶었습니다만,
다음 날도 약속이 있었다. 이번엔 책방 프로그램에서 만난 인연이었다. 오전에 올레길을 걷고 오후에 북토크를 하는 행사였는데, 각자 혼자 신청을 한 탓인지 올레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함께 식사도 하게 되었다. 그는 마침 내가 방문 입고를 하려던 우도의 책방을 알고 있었고, 겸사겸사 함께 우도에 가기로 했다. 약속된 날짜가 되었을 때 불어오는 바람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배가 많이 흔들리겠다고. 하지만 그건 굉장히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날 배는 뜨지 않았으니까. 엄청나게 불어오는 바람을 헤치며 급히 근처 다른 책방으로 향했다. 이미 몸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문제였다. 처음엔 별 문제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네비가 안내하는 왕복 2차선 숲길을 지나며 한가롭고 평화로운 드라이브를 즐겼다. 그런데 점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짙어지더니 저 먼 곳은커녕 앞 차의 번호판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 차가 내뿜는 불빛에 겨우 의지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이면 너무나 반가웠다. 깜빡거리는 비상등 불빛을 볼 때면 마음 한 끝에서 따스한 안도감이 번졌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다행스러움, 누군가가 함께 가며 내 길을 밝혀주고 있다는 희미한 연대감에 긴장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차가 많은 도로를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그때만큼은 차를 발견할 때마다 기뻐 소리치고 싶었다.
'저도 여기 있어요! 힘내세요!'
생각해보면 인생은 늘 계획한 대로는 되는 법이 없다. 내가 열심히 머리와 마음을 굴려 만들어 낸 계획표 위에 수많은 돌발상황이 흩뿌려진다. 어릴 때 나는 그런 순간마다 화가 났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집어 던지고 소리치고 싶을만큼 주체할 수 없을 분노가 온 몸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비바람에 몸을 맡기는 법을 조금씩 배워간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람이 나를 새로운 방향을 이끌고, 시야를 가린 안개가 마음을 열게 하기도 하니까. 계획표에 없던 길 위에서 만나는 낯선 공기가 갇힌 내 마음을 환기시키곤 하니까.
알 수 없는 내 인생, 예측 불가 워케이션, 내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