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케이션의 늪
대가 앞에서 숙연해진 어린 새
워케이션을 떠났다고 했지만 나의 시간들은 '장기출장'에 가까웠다. 여유롭게 읽고, 걷고, 먹고, 쓰는 일상을 꿈꿨지만, 빠듯하게 계획된 일정에 느긋함은 머나먼 이야기였다. 생각해보면 조급한 마음은 꼭 빠듯한 스케줄 탓만은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그러고야 말겠다는 나의 불타는 의지,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 강한 욕망은 무의식마저 지배했다.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때마저 내 머리와 마음은 아이템과 스케줄을 향해 뻗어있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여행 내내 일제 강점기 관련 기념관을 돌고,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을 들른 건.
사실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과 '한강'은 매우 좋아하지만 정작 '아리랑'을 읽은 적은 없었다. 재밌게 읽었던 두 작품의 시대적 배경엔 흥미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는 흥미가 없다 못해 가장 싫어했던 부분이었다. 이름만도 비슷한 온갖 독립 단체와 국내외를 넘나드는 그들의 행동반경을 외우면서 화가 났지만 차마 독립 운동가들을 욕할 수 없어, 이런 사단을 만든 일본 정부와 친일파들을 향해 쌍욕을 날리던 기억과 위인전에서 읽은 독립운동가들의 의지와 행보에 놀란 마음 탓에 왠지 기분이 나빠지는 시대였다. 그런 내가 굳이 '아리랑 문학관'을 찾은 이유는 다름 아닌 현재 쓰고 있는 작품 때문이었다. 1919년을 배경으로 하는 시나리오 때문에 관련 자료조사가 필요했다. 내 작품에 꼭 맞는 자료가 아니더라도 그 시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서 만난 건 부끄러움과 숙연함이었다. 그곳은 '아리랑' 문학관인 동시에 그 작품을 쓴 '조정래' 문학관이었기 때문이다. 아리랑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나 그 작품 속 인물에 대한 전시관도 있었지만, 그 작품을 위해 작가가 들인 노력과 고민의 흔적도 고스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작가가 작품을 쓰기 위해서 러시아와 중국 등을 직접 방문하고 그곳의 정경을 일일이 손으로 그린 그림은 놀랍다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또한 실제 전라도 방언을 생생하게 적기 위해 전라도 지역 내에서도 각 소도시 별 미세한 차이를 적어놓은 것이나, 인물의 특성을 반영하기 위한 다양한 이름을 사전처럼 구비한 철저함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한 세계를 창조해내기 위해서, 특히 한 시대의 수많은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 내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데 늘 게으름 뒤에 숨은 주제에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욕심만 부린 건 아닌지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동시에 데뷔도 못한 주제에 너무도 위대한 거장과 비교하는 자신이 조금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신차려, 이건 워'케이션'이야.
정읍근대역사관,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혹여 작품에 쓸 수 있을 법한 조각을 찾고 싶어 안달 난 내가, 관람객으로서의 느긋한 시선을 자꾸만 방해했다. 현재 작업하고 있는 작품과 전혀 관련 없는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갔을 때도, 제주 북페어의 4.3 관련 특별 부스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작품으로 쓰고 싶은 두 역사적 사건을 보면서 그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작품으로 엮어내고 싶은 마음이 계속 뒤엉켰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건져올려서 잘 엮고 싶은 욕망이 워케이션이라 쓰고 장기 출장이라 읽는 여정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책방을 돌아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여행을 갈 때마다 책방에 들르는 건 나의 오랜 취미이자 행복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책과 책방이 업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서부터 취미와 출장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가령, 광주에서 들렀던 '책과 생활'에서는 굿즈를 보며 아이템을 확장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미술 관련 책이 많은 '고호의 책방'에서 '터무늬 있는 경성 미술 여행'이란 책을 보고 '경성'이란 단어에 눈이 번쩍 뜨였다. 어쩌면 1919년대의 풍경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책을 잠시 뒤적이다 내려놨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신차려. 넌 지금 출장이 아니라 워케이션을 온 거라고!!'
평소라면 절대로 읽지 않을 책을 고르리라 다짐했건만 좋아하는 소설 <태고의 시간>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에세이를 보고 또 다시 묻어뒀던 욕망이 튀어나왔다. 아, 이 작가가 에세이도 있었구나. 이건 운명이야, 에세이에선 좀 더 날 것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을 지 몰라. 매일 하나씩 아껴 읽고 멋진 작가가 되어 보는 거야! 라는 생각과 함께 단숨에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과 함께라면 이번 워케이션에서 멋진 작품을 뚝딱뚝딱 써 낼 것만 같은 비합리적인 환상에 잠시 사로잡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 생각했다.
'정신차려. 너 워케이션에 온 거라고! 이건 출장이 아니야!'
결국 그곳에서 집어든 책은 '경성' 관련된 것도, '올가 토카르추크'의 책도 아니었지만 일에 대한 부담감과 빳빳한 긴장감은 계속되었다. 북페어가 끝난 뒤 숙소 사람들과 가진 오랜 저녁 식사가 끝난 자정, 다음 날 연재해야 할 '어른들의 사회생활' 아이템을 찾겠다고 밀린 시사 이슈를 정리하겠다고 설쳐댔고, 결국 에어팟을 낀 채 바로 잠든 사실을 깨달은 새벽, 붉은 눈을 비비벼 뉴스 기사를 스캔했다. 겨우 찾은 아이템을 정리하겠다고 누운 침대에서 생각이 아닌 잠에 빠져버렸고, 선잠에서 깨어난 나는 혼비백산이 되어 책상 앞에 앉았다. 생각을 많이 했던 주제였던 덕에 평소보다 조금 일찍 글을 마무리한 뒤에야 편한 잠에 들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월화수목금 매일의 마감, 두 개의 공모전과 책방 프로그램 준비로 정신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걸 하다 저걸 붙잡기도 하고, 저걸 열심히 하다 저걸 마무리 하기도 한다. 복잡하게 얽힌 생각 덩어리 속에서 내가 가는 길이 어딘지 알 수 없음에도 웃을 수 있는 건, 그 사이사이 튀어오르는 아이디어가, 문득문득 터저나오는 소재가 주는 짜릿함 때문이 아닐까. 과연 이 일로 밥을 벌어 먹고 살 수 있는지, 재능이 있긴 한지 불안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24시간 꽉 채워 나를 괴롭히는 이 일들이 주는 즐거움이 더 크다. 그래서 일까, 이달 초 '조용한 흥분색'에서 진행한 강연 이후 사장님이 조용히 다가와 준 피드백은 '자신이 본 강연자 중 가장 행복해 보인다'였다. '가장 잘한다'는 평이 아니라서 조금 아쉬웠지만, 그 말이 아주 오랜 기억 속 목소리를 건져올렸다.
"능력 있는 사람은 노력 하는 사람을, 노력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능력이 뛰어나거나 열심히 할 수 있다는 말을 감히 할 수는 없지만, 그 누구보다 이 일을 즐길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한참 취업 준비할 때, 마지막 멘트로 준비했던 말이었다. 실제로 준비한 이 말을 꺼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실제로 직장에서 일을 할 때 '표정이 밝아 일이 안 힘들어 보이니 웃지 말라'는 말을 들을 만큼 즐겁게 일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 조금 더 즐겁다. 그리고 조금 더 오래 즐겁고 싶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