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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Jul 24. 2023

일상의 봄

다시 일상으로 

운전하는 뚜벅이


"차 많이 끌고 다녔어?"

제주에서 통화를 하던 중 엄마가 던진 질문 앞에 잠시 머뭇거렸다. 음, 많이 끌고 다녔다고 하면 다시 돌아온 고유가 시대에 돈을 땅에 버린다고 욕을 먹을 것 같고, 차를 두고 걸어다녔다고 하면 어차피 주차장에 처박아둘 걸 비싼 돈 들여 탁송을 했다고 타박을 들을 것 같았다. 찰나의 시간 동안 머리를 굴리다 중간을 선택했다. 적당히 끌고 다녔다고. 핀잔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답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적당히 끌고 다녔다. 지인의 방문이나 일처리 때문에 멀리 가야할 때는 운전을 했지만 대부분 주로 걷는 걸 택했다. 


오일장이나 우체국, 책방, 카페 가는 길을 걷는 것만도 좋았다. 목적지까지 빨리 가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닿을 그곳에 '즐겁게' 가는 게 중요했다. 먼 길을 돌아가더라도 예쁜 해변이 보이는 길을 걸었고, 매번 가는 길이 아니라 낯선 골목을 향해 과감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핸드폰 지도 화면을 크게 확대해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 좁은 길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 모든 곳에 길이 있다는 게 좋았다. '여기에 길이 있어?'라고 생각이 들만큼 의외의 길을 만나는 게 반가웠고, 끊어진 길을 이어 만든 희미한 선 위에 고요한 발자국을 남기는 게 좋았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초록 밭 옆을 걸으며 그 사이 문득문득 보이는 노랑의 정체를 알았을 때 설핏 놀랐다. 생기를 더한다고 생각했던 노랑은 초록이 지난 시간의 흔적이었다. 시들어간 잎에 남겨진 자국 말이다. 누리끼리하다기엔 선명했고, 맥아리가 없다기엔 날렵한 누런 빛을 보자니 여러 감정들이 떠다녔다. 어쩌면 내 몸이 남겨진 세월의 흔적도 마냥 누렇기만 한 색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안도감, 여전히 인간은 자연에게 배울 게 참 많다는 숙연함 같은 것들. 비슷한 마음들은 영산강 드라이브 코스를 지날 때도, 목포의 좁은 골목을 걸을 때도 따라다녔다. 

                        

일상의 봄을 만나는 법


"제주에서 먹은 것 중에 뭐가 제일 맛있었어요?"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 밤, 떠나는 나를 위해 마련한 식사자리에서 숙소 사장님이 물었다. 글쎄. 생각해보니 제주라고 특별히 먹은 음식이 딱히 없었다. 친구들이 왔을 때 고등어회를 두 번 먹고, 흑돼지 구이를 한 번 먹은 정도. 혼자 있을 때는 오히려 숙소에서 해 먹은 밥이 더 많았다. 그래서 일까? 제주나 목포, 나주, 군산에서 걸었던 작고 예쁜 길 끝에 서 있는 일상이 어서 돌아오라 손짓할 때, 생각보다는 크게 아쉽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 저곳 터를 옮겼을 뿐 이미 일상을 살아내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여행 내내 특별한 이벤트랄 것도 없었다. 


눈을 뜨면 마감과 글감을 고민했고, 밥값과 커피 값을 아끼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끊임없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자주 걸었다는 것. 바쁜 와중에도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만큼은 주변을 둘러보다 뜬금없이 주저 앉아 풀을 바라보고 핸드폰 카메라 렌즈를 들이 밀었다는 것. 조용한 길 위에 멜로디를 얹고 바람결에 몸을 흔들어댔다는 것 정도랄까. 그렇게 품은 일상의 여유가 좋았다. 비록 워-------------케이션이었지만, 쉼표처럼 끼어든 그 찰나의 봄들이 좋았다.


일탈에서 얻은 빛을 다시 일상으로


"쌤은 보석이잖아. 다이아몬드. 무조건 도시에 살아야지."

서울은 답이 아닌 것 같은데 딱히 연고가 있는 지역은 없고, 대체 어디서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내게 본업이 사주 상담인 지인이 말했다. 나는 아주 강한 금의 기운을 타고 태어난 사람, 보석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이니 화려한 도시가 딱 어울리는 삶이라고 했다. 그러냐고 웃으며 넘겼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오히려 내가 도시에서 매력을 느꼈다면 그건 화려한 불빛 뒤에 숨긴 의외성, 얽히고 설킨 오랜 역사, 여기저기에서 모인 사람들이 품은 다양한 이야기 때문이다.


작은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풍경은 더 좋아한다. 회색 도로 주변에 일렁이는 푸른 물결 같은 것들. 이번에도 조금은 투박하고 꽤나 정겨운 소도시의 공기가 내게 깊이 배인 대도시 자본 냄새를 아주 조금은 덜어내는 기분이었다. 엄청난 인구밀도 사이에서 두 발이 떨어지지 않게 안간힘 쓰느라 주르륵 흐르던 땀방울과 짠기 어린 눈물 방울도 날려주었다. 그리고 조금 힘을 빼는 법을 속삭여주었다. 강한 바람에 버티는 법은 잔뜩 힘을 주는 게 아니라 몸에 작은 구멍을 내는 것이라고. 그래서 다시 돌아갈 일상에서 나는, 온 힘을 다해 버티다 쓰러지기 보다는 가끔 구멍 하나 내는 쪽을 선택하려 한다. 그 사이로 숭숭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며 여유를  부려볼까 한다.


어릴 땐 무조건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매 순간 빛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욕심많은 꼬마였다. 여전히 빛나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더는 다른 이에게 어두운 그늘을 만드는 빛을 꿈꾸진 않는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뜻밖의 예쁨을 찾아내 비춰주는 빛, 그 사소함에서 또 다른 빛을 찾고 보석으로 만들어 주는 빛, 그런 반짝임을 갖고 싶다. 그러니 나는 화려함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작은 화려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내가 닿는 시선과 발걸음마다 보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꺼내 읽는 당신에게도 그런 존재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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