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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취인불명

비겁자의 변명

by 정담아

어제 꿈에서 너를 봤어. 심장이 빠르게 뛰더라. 아주 오랜만에 너를 마주한 탓인지, 네가 내민 손 탓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유를 생각할 틈이 없었어. 그저 나는 내 심장소리가 너에게 들릴까 조바심이 났거든. 재빨리 손을 뻗어 네가 건넨 쪽지를 받았어. 그 작은 종이를 앞에 두고 한참을 망설였어. 너무 궁금했고, 그래서 너무 두려웠거든. 긴 시간을 건너 내게 보내는 너의 언어는 무엇일까.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땀이 종이 쪼가리의 끄트머리를 검게 만들었어. 혹여 네가 건넨 단어에 짠기가 배어들까 축축함을 털어냈어. 마음을 가다듬고 종이를 펼치려다 한 번 더 멈칫 했어. 후우- 긴장이 멀리 나가버리길 바라며 힘껏 숨을 내쉬었어. 하아- 이게 뭐라고 진짜. 고작 이런 것 하나에 마음 졸이는 내가 우습다 생각하며 단번에 종이를 펼쳤지만, 난 느꼈어. 미세하게 떨리는 손길을. 뒤이어 더 거칠게 흔들리는 떨림도.


비겁.

축축함이 밴 종이 속 쭈글쭈글한 글자를 핸드폰 검색창에 옮겨보았어. 아까와 달리 반듯하게 펴진 글자는 왠지 더 얄미웠어. 제일 처음 나온 문장 속에 ‘비견과 겁재’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어. 사주 명리학과 관련된 어휘더라.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 어설피 조각을 맞추어 보니, 그건 또래를 의미하는 글자로 친구나 라이벌을 가리키는 말이래. 사주에 비겁이 많으면 협력자도, 경쟁자도 많다더라. 물론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해석의 여지는 많이 달라지겠지만. 어떻게 알았어? 내 사주에는 비겁이 많다던데. 이래저래 비겁과 연이 깊은 생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곰곰이 헤아려봤어. 우리는 서로에게 어느 쪽이었을까?


참 겁이 없어.

넌 내가 참 신기하다고 했어. 처음엔 굉장히 낯을 가리면서 경계를 서성이는 것 같은데 어느샌가 성큼 들어와 버린다고. 갑자기 불쑥 다가와서는 자신을 활짝 내보인다고. 그래서 상대마저 무장해제시켜버린다고. 내가 그랬던가. 네 말을 듣고서야 찬찬히 생각해봤어. 맞아. 나는 좀 그래. 낯선 세계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느닷없이 불쑥 들이대고 말지. 그런데 말야. 네가 모르는 게 있어. 나는 겁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게 아니야. 그 보단 두려움을 가득 안고 엄청나게 거리와 속도를 재는 편이지. ‘이렇게 불쑥 친근함을 표현해도 될까?’, ‘날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너무 무례한 건 아닐까?’ 수없이 많은 고민 끝에 걸리는 건 이거야. ‘저 사람을 믿어도 될까?’ 한번 마음을 열면 순식간에 한껏 열어젖히는 날 잘 아니까. 그렇게 나의 모나고 못난 부분까지 마음껏 드러내다 결국 마주하는 상대의 뒤통수도, 나와 다른 상대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정신없이 맑다 결국 흐릿해지는 내 앞통수도 더는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늘 내가 문을 두드리길 선택하는 이유는 겁이 없어서 아니라 그냥 그게 편해서야. 이것저것 재고 의심하는 게 더 불편해서. 넌 내게 그렇게 겁 없이 남을 믿어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말했지만 실은 엄청나게 이해타산적으로 선택한 거야. 힘이 덜 드는 효율적인 쪽을.


난 겁이 많아.

사람들은 처음 한 번이 어렵다고 하지만, 난 두 번째가 더 어려워. 두 번, 세 번의 두드림은 실패를 맛 본 뒤에 다시 일어나는 용기까지 더해져야 하니까. 더 짙고 단단한 마음이 필요하니까. 진짜 내 편이라고 믿었던 너와 왜 멀어졌는지 난 잘 모르겠어. 그래서 여전히 수많은 순간을 떠올려봐.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들, 함께했던 순간의 공기와 나란히 걸었던 공간들, 너의 표정과 문장들을. 지금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인 그 조각들을 여전히 가끔씩 꺼내봐. 그때마다 꼬깃꼬깃 접은 인사말을 손에 꼭 쥐곤 해. 결국 그 상태로 희미해버리고 만 문장들을 보며 생각해. 한때 내 과거와 현재, 미래 속 기쁨과 슬픔을 나누던, 나의 치명적인 부분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였던 넌, 내게 어떤 존재일까? 너무도 가까웠기에 너무도 서운해져버린, 속속들이 잘 알아서 더 조심스러운 우리는 서로에게 어느 편일까? 어디쯤에 서 있을까?


난 비겁자야.

나를 지키려고 종종대다 정작 놓친 수많은 마음이 종종 아파. 내가 지키지 못한 마음이 얼마나 될까. 제때 보내지 못한 마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앞으로도 나는 계속 겁이 날 것 같아. 상처받는 내가 너무 애틋해서 계속 두려울 것 같아. 그럼에도 끝까지 걸어갈 거야. 내가 바라는 건, 겁이 나도, 무서워도 끝까지 가는 거니까. 난 여전히 꿈을 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과 함께 호흡하며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 것. 그러다가 넘어지면 부끄러워 고개를 땅에 처박으면서도 기어이 다시 일어서는 것. 상처투성이가 된 몸뚱이를 끌어안으며 또다시 걷는 것. 마주한 누군가의 상처를 호호 불어주는 것. 길을 걷다 넘어진 신음에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미는 것. 실수로 넘어진 사람의 손을 밟으면 도망치지 않고 고개 숙이는 것. 예상치 못한 예쁨에 계획 없이 잠시 걸음을 멈추는 것. 그 아름다움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그런 삶을 사는 것.


나의 비겁은 내게 힘이 될 거야. 상처받고 다시 일어나는 건, 상처 없는 것보다 더 단단한 법이니까.

그래서 난 나의 비겁에게 단단한 손을 내밀 거야. 함께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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