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필요한 우리
'족보를 정말 족발 보쌈 세트로 알던데?'
친구로부터 온 메시지였어. 문해력 논란을 다룬 기사를 가지고 한참을 이야기를 나눈 뒤였지. 시발점과 두발자유화, 가로등 같이 기사에 나온 단어들을 실제로 초등학생들에게 물었더니 엉뚱한 답변이 돌아왔다는 거야. 충격과 웃음을 쏟아내던 친구의 마지막 말은 이거였어.
'그런데 이게 정말 아이들의 문제일까?'
여기저기서 문해력을 두고 말이 많아. 핵심은 한마디로 요즘 아이들이 충격적으로 문제라는 거야. 그런데 이 논란에도 반론은 있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인 문해력 앞에서 단순히 단어의 의미를 아는 지 여부만 확인하는 '어휘력'을 보고 있다는 거지. '이해'가 핵심인데 '지식'만 두고 얘기하는 건, 삶의 맥락을 빠뜨린 채 암기만 강조하는 우리 교육의 현실과 너무 닮아 있는 듯 했어. 아이들이 지나온 삶의 맥락을 지운 채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 것까지.
일단 한자의 영향이 강한 국어에, 한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아이들이 취약한 건 당연한 일인 것 같아. 다만, 한자와 무관하게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라면 익숙해질텐데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게 좀 이상했어. 굳이 책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과 대화만 자주 하더라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거잖아. 어쩌면 핵심은 아이들의 문해력이나 어휘력이 아니라 세대 간 단절에 있는 게 아닐까.
사실 나도 너희들이 쓰는 단어 중에 생소하다 못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꽤 있어. 맥락상 대략 파악하더라도 실제로 응용해서 쓰기엔 주저하게 되는 신조어들이 참 많더라고. 너희들과 한 공간에 있을 때 동료들이랑 새로 쏟아진 낱말들을 펼쳐놓고 대체 무슨 뜻일까 추측한 적도 꽤 있었어. 조금 익숙해진다 싶으면 또다시 낯선 말들이 우수수 쏟아지곤 했지. 그런데 좀 신기한 건 처음엔 좀 이상하다 싶었던 표현들이 어느 새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거야. 헐, 대박, 1도 모르겠다, 빡쳐, 같은 것들. 처음에는 조금 과격해보이기도, 가벼워보이기도 했던 그 말들이 어느 새 너무 자연스럽게 혀끝이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걸 보면, 언어라는 건 억지로 학습한다기보다 자연스레 몸에 익는 것 같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어휘력이 부족하다고 혀를 차고,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신조어를 모르는 뒤처진 세대라
수군대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건넬 언어를 잃어버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조금 이상하지? 이렇게 자기 표현이 강한 시대에 언어가 사라진다는 게. 수많은 sns에서 자신의 일상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글이 넘쳐나고, 책이나 다양한 플랫폼을 이용해 너도 나도 작가가 되는 시대잖아. 그런데 말이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는데, 정작 그걸 들어줄 사람은 없지 않니? 그러니까 세상에 떠도는 대부분의 말이 그저 홀로 쏟아내는 일방적인 언어일 뿐 어딘가에 닿고, 반응으로 연결되는 쌍방향의 언어는 아니라는 거야.
"그거 알아? 요즘 애들 영화, 드라마 못 본다?"
중학교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이 말을 했을 때 조금 놀랐어. 책도 아니고 영상인데 애들이 안 본다고? 그 이유는 조금 더 놀라웠어. 너무 길다는 거야. 긴 시간 동안 누군가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힘들다는 거지. 영화야 솔직히 길어서 나도 영화관이 아니면 집중을 잘 못하는 게 사실이거든. 그런데 드라마까지? 물론 이건 긴 시간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소리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어쩌면 타인의 삶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닐까? 누군가의 생을 들여다보고 깊이 빠져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건 아닐까? 책이든 영화나 드라마든 다른 사람의 이야기니까.
학폭이나 아동학대 신고 건수가 엄청 많다는 말에 놀랐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어. 폭력에 민감해진 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게 서로에 대한 존중으로 나아가기보다 '내 권리'를 지키기에 몰두하고, '신고'라는 일방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게 조금 슬펐어. 학폭이나 아동학대가 주는 언어의 강도보다도 '신고'라는 일방적인 방식이 주는 서늘함, 그 온도에 따끔했던 것 같아. 그리고 생각했어. 어쩌면 '신고'라는 공식적인 방법으로 곧장 향하는 이유가 다른 방식에 서툴러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사실 더 가까운 관계, 신뢰가 두터운 관계일수록 대화같은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잖아. 물론 그 사이에서 서로를 향한 날 선 언어로 상대를 할퀼 수도 있지만 그런 피곤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분명 배우는 게 있잖아. 상대와 나의 간극을 확인하고,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한 타협안을 만드는 방법 같은 것들. 그 모든 길목에서 대화는 필수고 말이야.
'신고'를 통한 일방적인 해결보다는 '대화'를 통한 쌍방향적인 소통방식을, 그 과정에서 만나는 마음의 균열과 수많은 기분을, 지난한 시간을 지나 결국 닿는 결과를 경험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건 글로 배운다기보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거잖아. 일상 속에서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상대와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온도차를 알아차리는 법을, 내가 느끼는 냉기를 설명하고 상대의 바람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 대화가 가정에서, 학교에서 시작된다면, 사회에서 만나는 수많은 세대가 교류하는 과정에서 싹튼다면 자연스레 서로의 언어도 배우게 되지 않을까?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타인을, 그가 살고 있는 삶의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니까. 그러니 문해력이 떨어지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저마다 제 목소리를 높이면서 정작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으려는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
이제 노력해보려고 해. 나와 다른 타인과 대화해보려고 말이야.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의 언어나 불편함을 느끼는 타인의 태도를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는 연습을, 맞은 편에 앉은 이의 이야기를 듣는 노력을 해보려고 해. 그 지난한 과정 속에서 기분이 상하고 꽤나 상처를 받더라도 결국 조금은 나아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야. 혹여 서로의 주파수가 맞지 않는다고 해도 상대에게 맞는 파장을 찾아가는 동안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상대가 존재하는 삶의 맥락을 이해하게 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