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와 호인 그 사이
'아무래도 우리가 애들을 잘못 가르친 거 같아.'
예전 직장 동료와 카카오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문득 이런 말을 했어.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라', '지각하지 말아라', '기한 맞춰 제출해라' 같은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아 있으니 말이야. 미리 예외 상황을 말하고 양해를 구하는 건 괜찮지만 뒤늦게 변명을 하는 건 안 된다며, 그저 지나칠 수 있는 지각이나 제출 지연에 대해서 꼭 짚고 넘어갔던 내 행동들이 후회됐어. 어차피 세상엔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매번 일처리가 늦은 사람들 투성이니 말이야. 지각을 해도 괜찮다, 늦게 제출해도 상관없다, 할걸. 세상은 다 그런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줄걸. 그런 마음이 들었어. 괜히 누군가를 배려하고 혼자 모든 약속과 시간을 지키다 호구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염려되었거든.
나도 마찬가지였어. 괜스레 지킨 예의 탓에 좋은 먹잇감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문득 두려워졌거든. 생각해 보면 별로 새로운 일도 아니야. 직장에서도 좋은 마음으로 누군가가 부탁한 일을 도와줬다가 당연히 시켜도 되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있었거든. 뒤늦게 그런 대우에 이의를 제기하면 '그렇게 안 봤는데 성깔 있다'는 평을 듣곤 했지. 프리랜서를 하면 좀 나을 줄 알았어. 프리랜서는 조직 밖에 나와 혼자서 일을 하는 거라 생각했거든. 정말 순진한 착각이었지. 프리랜서야 말로 수많은 사람들과 협업하는 일이었어. 기획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도 공간이 필요하고, 독립출판을 한다고 해도 인쇄해 줄 인쇄소와 유통해 줄 책방과 함께 해야 하니 말이야.
이런 수많은 과정을 지날 때마다 글 쓰는 게 가장 쉽다는 생각이 들었어. 글 작가를 꿈꾸는 내게 언제나 글은 언제나 어려운 과제인데도 말이야. 특히 책을 만들 때마다 정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곤 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인쇄 때문이야. 애초에 전혀 모르던 분야였기도 했고, 여기저기서 수업을 들어봐도 여전히 실무적인 부분에서 너무 부족함을 느끼거든.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업체에 의뢰를 할 때도 늘 을이 된 기분이 들곤 해.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게 힘든데 모르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정말 죽을 맛인 거야.
게다가 인쇄 과정에서 사고도 빈번하게 일어났어. 어찌 보면 소비자 입장에선 별 일 아닐 수도 있지만(사실 책 살 때는 파본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거든) 판매자로선 그냥 넘길 수 있는 일들이 벌어졌지. 책 절단면이 고르지 못하거나 책 본드가 잘 채워지지 않은 경우부터 면지(표지 바로 다음 장에 들어가 있는 색종이)가 아예 잘못되어 나온 경우, 컬러로 나와야 하는 인쇄가 흑백으로 출력된 경우까지 있었어. 그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사실 크게 화가 나진 않았어. 사람이 하는 일인데 실수가 있는 건 당연하잖아. 다만 업체에 다시 연락을 하고 수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피로하게 느껴졌어. 무엇보다 가장 큰 피로감을 선사한 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한 번은 결심했어. 돈을 많이 쓰더라도 책임지고 최상의 퀄리티를 낼 수 있는 업체를 찾겠다고. 인터넷 검색과 지인 추천 리스트 리뷰를 꼼꼼하게 확인한 뒤 무려 평점이 5점 만점인 곳으로 향했지. 상담부터 이미 마음에 들었어. 이것저것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모습이 좋았고, 다양한 경험이 많아 보이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 후가공이 들어갈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좋은 파트너를 만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았어. 담당자와의 대화 끝에 견적서를 뽑았어. 다른 곳에 비해 무려 2배 이상 비쌌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비용이 얼마나 들던 책이 나오는 동안 편안한 마음과 좋은 결과물이 중요했거든.
그런데 이게 웬걸.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발생했어. 일단 그곳은 기존에 내가 했던 것과 바른 방식으로 출력 파일을 만들었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설명을 대강 해주었지만 사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명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어. 하지만 그렇게 해야 '잘 나온다'니까, 난 이미 계약금을 지불한 이후니까, 어쩔 수 없이 열심히 그들의 말을 따랐어. 어버버 하는 내가 그들에게 분노 유발하지 않길 바라면서. 어쨌든 그들은 나보다 그 분야의 전문가니까 나보다 낫다고 믿었거든.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우여곡절 끝에 약속 기한 하루 지나 받은 책은 거의 모든 게 파본이었던 거야. 표지 뒷부분이 구겨진 채 와서 도저히 팔 수 없는 상태였어. 미리 계획된 프로그램과 마켓 일정에 맞춰 책을 인쇄한 건데 그런 일이 벌어져 조금 짜증이 났어. 하지만 뭐 사람의 일이라는 게 어찌 완벽할까, 어쨌든 최선을 다해 수습하려는 태도에 마음이 누그러졌어. 담당자는 정말 면목이 없다며 계약한 발행부수의 2배인 1000부를 다시 찍어주겠다고 했어. 그 과정에서 파일을 다시 만들고 종이도 새로 변경하기로 했어. 그런데 조금 당황스러운 말을 들었어. 빠듯한 일정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뉘앙스의 말을 뱉는 거야. 상담할 때 분명 해당 날짜까지 인쇄 가능한지 물었고,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진행한 계약이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그 말을 뱉지 못했어.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너무도 빠르게 스쳐 지났거든.
서두르다 사고 났다는 말이 나올까 싶어 이번엔 최대한 채근하지 않았어. 그래서였을까? 처음에 일주일 안에 찍어준다던 책은 기약 없이 계속 미뤄지기만 했어. 그러는 동안 난 예정대로 출간 기념 북토크를 하고 북마켓에도 참여를 했어. 그리고 북마켓에서 인쇄와 디자인 관련 일을 했던 작가 한 분을 만나게 되었어. 그리고 알게 되었지. 그쪽에서 바꾸어준다는 종이는 원래 업체에서 가지고 있던 종이일 가능성이 높고, 2배 이상 비싸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일 수도 있단 사실을. 한참을 듣고 있던 나는 예상했지만 외면했던 말을 뱉었어.
"혹시 제가 호구가 된 걸까요...?"
좋은 사람이고 싶었어. 아무 이유 없는 친절을 마주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잖아. 나는 그런 우연을 바라고 또 그런 우연을 던지는 사람이고 싶었어. 적어도 괜한 분노와 짜증을 뿌리고 다니고 싶진 않았어. 하지만 그렇다고 호구가 될 생각은 없었어. 그저 내가 대우받고 싶은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고 싶었을 뿐이야. 돈을 지불한다는 사실만으로 갑질을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가진 전문성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고 그들의 일처리를 방식을 존중하는 협력자가 되고 싶었어. 그런데 그러는 사이 나는 나도 모르게 호구가 된 기분이 드는 거야. 그다음 날 바로 재촉의 연락을 연이어 한 뒤에야 정확한 납기 날짜를 들었고, 결국 첫 책을 받은 지 20일 만에 마지막 책을 받게 되었어.
그렇게 마무리되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 책마다 표지 색은 미세하게 달랐고, 미싱 실도 센터를 벗어난 게 꽤나 많았어. '늦어져 죄송하지만 최대한 퀄리티 높은 책을 뽑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해 달라'라고 말하던 담당자의 말이 책 위로 흩어졌어. 개성으로 볼 수 없는 파본도 약 150권 정도 나왔어. 연락을 해볼까 했지만 어차피 무료로 다시 찍어주는 500부에서 제하면 되지 않겠냐는 답변이 돌아올 것만 같았어. 물론 죄송하다는 말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능글맞은 변명도 포함되겠지. 하지만 '해결책'이 필요한 내게 그 모든 건 어차피 의미 없는 일이었어. 다시 책을 뽑아줄 리는 없을 것 같고, 그들에게 귀책사유가 있긴 하지만 이미 새로 인쇄를 하면서 손해가 났을 테니 할인을 해줄 것 같지도 않았거든. 다만 이런 식으로 내가 호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어. 그렇다고 해결책 마련도 안 될 게 뻔한데 굳이 전화해서 내 불편을 호소하는 건 하고 싶지 않더라.
비슷한 일은 참 많아. 강의나 원고를 요청하면서 강사료나 원고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기도 하고, 일을 마쳤는데 한참 동안 돈을 주지 않는 곳도 허다해. 계약서조차 미루거나 생략이 관행이라며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곳도 있고 말이야. 계약 조건이나 진행 상황을 물어보면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되받아 무안을 쥐고 동동댈 때도 많아. 그럴 때마다 너희들이 떠올랐어. 상식을 요구하고 기본 예의를 지키다 호구가 되어 있는 건 아닐까? 상대를 배려하다 자신을 돌보는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냥 큰소리치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어디 가서나 그저 막무가내로 소리 높이고 우기라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으니 그저 능글맞게 말하고 지나치라고 말해줄 걸, 그런 후회가 스칠 때가 종종 있어.
후회로 얼룩진 파본은 빼고 성한 책을 가지고 책방에 입고를 시작했어. 택배를 부치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지. 늦은 오후라 그런지 이미 당일 수거는 마감되었고 주말 내내 보관하기 애매하다며 난색을 표했어. 그래서 택배 무게를 측정하다 말고 취소 버튼을 눌러버렸어. 그냥 훽 나가버리기 뭐해서 사장님께 '월요일 오전에 오겠다'라고 말하고 나가려는데, '괜찮으니 그냥 접수하고 가라'는 거야. 그리고 계산하는데 그런 말을 하더라.
"다들 어떻게든 보내겠다고 난린데 참..."
그 말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진 건 왜였을까? 그 순간 생각했어. 그저 호의를 건넬 뿐인 나를 호구 또는 호인으로 만드는 건 상대의 마음이라고. 그리고 내 호의(혹은 그저 예의)를 호구의 표현으로 읽는 사람에겐 빠르게 내어 준 온기를 거두고, 높게 다독여주는 이에겐 더 많은 마음을 뿌려야겠다고. 누군가가 내게 내민 사소한 호의나 예의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이 세상에 호구보다 호인이 많아졌으면 좋겠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너희들이, 우리가 예의와 상식을 갖춘 세상에서 마음껏 호인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