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밖의 복잡한 세상
새벽녘 창 사이로 문득 불어오는 바람에서, 늦은 밤 서둘러 옮기는 발걸음을 따라오는 공기에서 서늘함을 느꼈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열기가 빠진 온도를 느낄 때마다 놀라곤 해. 늦었지만 어설프게라도 절기의 약속을 지켜내는 지구의 변화가 너무도 신비로워서. 힘겨운 상황 속에서 이토록 성실하게 자신의 몫을 해내는 자연에게 우리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너무도 늦은 발걸음에조차 뜨거운 열기를 떼지 못한 가을을 걸으며 미친 듯이 폭발하던 더위와 느닷없이 퍼붓던 빗줄기가 떠올랐어. 그 속에서 울부짖었을 누군가의 절규도.
기후 위기.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말이 되어버린 네 글자 덕에 일회용품 사용을 피하고 쓰레기를 접어 버릴 때마다 주변에서 듣던 '유난스럽다'라는 말이 사라졌어. 정말 싫어하던 말을 덜 듣게 되었는데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어. 그만큼 위기가 짙어졌다는 의미기도 했으니까. '위기'라 불릴 만큼 거세게 변하는 기후도 두렵지만 그 변화가 가져오는 '재난'이 더 무서웠어. 늘 나의 관심사는 자연 그 자체보다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가장 무서운 건 그 '재난'이 가장 낮은 곳부터 차오르기 시작한다는 사실이었지.
장마라 부를 수 없는 무지막지한 폭우를 볼 때마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이 떠올랐어. 미친 듯이 비가 내리고, 그 비가 하염없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리던 그 장면. 꽤 길었던 그 씬을 보면서 생각했어. 대체 어디까지 흘러갈까, 대체 언제까지 쏟아질까.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던 비는 가장 낮은 곳으로 휘몰아쳤고, 낮은 곳에 머물던 이들의 터전을 삼켜버렸어. 현실도 영화와 크게 다르진 않았지. 침수된 집을 빠져나왔던 영화 속 주인공과 달리 현실은 공간에 머물던 사람들까지 삼켜버렸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몇 명의 죽음을 목격하고 나서야 정치권과 언론이 반지하의 삶에 주목하기 시작했어.
당시 서울시는 반지하 퇴출 정책을 발표했어. 역시 놀라운 발상이었지.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이후 해경을 해체하고 수련회를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던 정부가 떠올랐어. 반지하에 살아서 이런 사고가 생겼으니 그런 위험한(?) 곳을 아예 없애버리면 된다는 논리. 참으로 간단하고 명료한 그들의 세계가 부러웠어. 그들과 달리 복잡하게 꼬인 나는 생각했지. 그럼 반지하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결국 몇 년이 흐른 지금, 정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사업이 성공적이지 않다는 기사를 봤어. 지상층과 지하층의 전세 보증금이나 월세가 꽤 차이가 크기 때문에 사업성이 떨어지는 거지.
갑자기 부끄러워졌어. 너희에게 가르쳤던 '사회보장제도'가 떠올랐거든. 나는 수업시간에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서비스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우리나라의 복지제도에 대해 설명했어. 사회보험의 대표적 사례인 4대 보험과 생계급여, 주거급여와 같은 공공부조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 수능에서 무조건 한 문제는 출제된다며 각각의 특징을 공통점과 차이점 중심으로 기억하라며 표도 그려주었어. 최근에는 자료 분석 형식으로 많이 출제되는 패턴을 보인다며 관련 문제를 풀어주기도 했었지. 그때는 나도 잘 떠올리지 못했어. 급작스럽게 불어난 물속에서 괴로웠을 얼굴을 말이야. 문득 마주한 기사 때문에 그 단원을 수업했던 날들이 떠올랐어. 동시에 잔뜩 부풀어 오른 물 위에 너희들 얼굴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어. 목까지 차올라 가뿐 숨을 헉헉대며 내게 소리치는 것만 같았어.
'선생님, 사회보장제도가 있다면서요! 국가는 국민들의 삶의 질을 보장할 책임이 있다면서요!'
허공에 대고 나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어. 사회보험의 경우 소득 수준에 비례해 비용을 부담한다는 점에서 소득재분배 효과가 있다고 교과서에 나오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했던 거 기억하느냐고. 국민건강보험을 예로 들지 않았었냐고. 조조할인(오전 6시 30분 전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할인을 받을 수 있단다)을 받고 출근하고 해가 진 뒤에 퇴근을 하면서 월급은 쥐꼬리만큼 받기에, 아프면 병원에 가기보다는 참는 걸 택하는 나의 이야기를 꺼냈었지. 진료받을 수 있는 시간이 출근 시간과 겹치는 직장인들은 병원에 가기 꺼리게 된다는 말도 했어. 하지만 돈도 많고 시간도 많은(돈이 많은 사람들이 주로 시간도 많은 세상 아니겠니) 이들은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서 온갖 검사와 치료를 받곤 하지. 그러면 결국 그들이 우리보다 국민건강보험료를 더 많이 낸다고 해도 우리보다 병원을 자주 가기에 결과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받는다고 했잖아. 그래서 교과서에서 말한 것처럼 소득재분배 효과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변명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어. 그 뒤에 빠르게 덧붙였으니까. 그럼에도 시험문제로 나오면 '소득재분배 효과가 있다'를 정답으로 표시해야 한다고.
미안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지만 결국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시험이라는 단순 명료한 세계 뒤로 숨어버렸음을. 슬쩍 꺼낸 세상의 복잡성을 비겁함으로 빠르게 지워버렸음을. 이제야, 뒤늦게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던 반지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기생충>의 가족이 그러했듯 반지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 공간을 선택한 것은 아니야. 그들에게 주어진 예산 안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일 뿐. 그런데 반지하가 사라진다면? 높이 치솟은 가격을 내세운 집들 중에 과연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
정부는 말했었지. 주거취약계층에 공공임대주택을 우선 배정해 이주를 지원(주거상향 사업) 하는 정책을 반지하 거주민들에게도 적용하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공급 물량을 1만 가구로 늘리겠다고. 그런데 그 물량으로 현재 반지하 거주 인구를 수용하기에 턱도 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다른 문제도 있어. 정부가 시행하는 대부분의 이주정책이 품고 있는 보이지 않는 폭력성, 반지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삶의 '맥락'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재개발 정책이 그렇듯이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그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맺고 있는 여러 관계를 제거해 버리곤 해. 물론 그 조차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그저 '저기 집 지었으니까 저기로 가서 살아'라고 말하곤 하지. 사람에게 집이란 건 '건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말이야. 기본적인 인간관계나 일터, 학교 등 다양한 생활공간과 얽혀 있고, 다른 존재와의 관계성으로 완성되는 '삶의 공간'이 집이잖아. 하지만 정부가 제시하는 정책엔 '삶'에 대한 고민이 빠져있는 것 같아. 마치 교과서처럼, 수능 시험을 위해 달리던 내 수업처럼.
다문화 사회를 주제로 하던 수업 시간에 보여줬던 짧은 영상이 떠올라. 그때 그걸 보여줬던 이유는 몽골에서 온 아이의 한 마디가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어.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반지하라는 공간을 알게 되었다고, 땅이 넓은 몽골에서는 지하에 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는 그 말. 그게 퍽 인상 깊었어. 그리고 말하고 싶었어. 누군가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어떤 세계에선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게 우리네의 삶이라고. 그 사실이 비극이기도 하지만, 때론 희망이기도 하다는 것도. 나는 우리의 상상이 조금 더 따뜻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어. 그 속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