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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는 당신을 믿기로 했습니다.

by 정담아

'담아님 너무 멋져요.'

뜬금없는 그 문장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내가 멋진가? 한없이 지질하고 구차하고 꼬이고 못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멋진 구석이 있던가. 당신은 나는 잘 모른다고, 멀리서 가끔씩 지켜보니 그런 거라고 나를 잘 알게 되면 분명 속았다며 혀를 내두르거나 뒷걸음질 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언제 어디서든 뒤틀린 점, 차가운 부분, 비관적 전망을 먼저 찾아내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의 칭찬이 고이 바라보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하고 한 걸음 물러나게 되는 사람.

감사하게도 그런 내 곁에 넘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그런 사람들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지지 않은 사랑스러움과 바짝 마른 햇볕 냄새가 나는 사람들. 바스락거릴 만큼 얄팍한 밝음이 아니라 묵직하게 박한 뿌리를 가진 선함을 가진 사람들. 그들은 언제나 내게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넌 해낼 것 같은데.

내가 가진 의미 없는 이력과 경력으로 나를 판단하지 말라고, 지금의 나는 능력도, 의지도, 성실도 없는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가끔 아주 가까운 친구에게는 그런 비슷한 말을 거칠게 혹은 가시를 빼고 부드럽게 전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첫 장편소설을 쓸 때도 그랬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고, 결국 갑자기 2주 만에 장편소설을 써내야 했다. 어차피 계약 전이었고, 명확한 고지도 없는데 그냥 안 한다고 할까, 단편소설도 제대로 써본 적 없는 내가 어떻게 장편소설을, 그것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뚝딱 쓸 수 있을까. 겁이 났다. 그게 지면으로 출판된다고 해도 벅차기보다 부끄러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결국 해낼 거 아니냐고. 정말 힘들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넌 할 수 있을 거라고. 너는 그래도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만큼 해오지 않았느냐고, 꾸준히 하는 게 멋지고 대단하다고, 그러니 이번에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저 귀찮아서 둘러대는 말이 아니라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내는 듯한 문장이 내 마음에 꾹꾹 박혔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그 말을 꺼내 물었다. 입안에 오랫동안 넣고 조금씩 녹였다. 아주 오래, 천천히. 채 녹지 않은 그 말을 계속 물고 지냈다. 어느 날 문득 혀뿌리에 닿는 달콤함에 깜짝 놀라 아, 내게 이런 게 있었지, 하고 또 입안에 굴리며. 그 덕분에 결과물의 수준과 무관하게 어쨌든 나는, 써냈다.

그게 무엇이든 '평균값'이라고 판단하는 그 기준이 높은 편이지만 나를 향할 때는 더 야박하다. 그래서 내가 자랑스러운 날보다 한심한 순간이 많았다. 이 정도는 누구나 하는 거고, 이것도 하지 못하는 내가 기막혔다. 딱하거나 가엽다는 마음보다는 답답함이 컸다. 대체 너는 왜 이러니. 왜 이것밖에 못하니. 그러면서도 왜 노력하지 않니. 왜 이렇게 게으르니. 심지어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마음까지 흐릿해져 버린 것도 야속했다. 그래도 사람이든, 일이든 좋아하는 걸 미친 듯이 좋아하는 거 하나는 잘한다고, 그래서 신나게 즐겁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마저 덜컹거리니 정말 나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구나 싶었다. 그러면 대체 뭘 내세워 당선이 되지, 무엇으로 독자들에게 어필을 할 수 있지, 고민하다 결국 그러니까 안 되겠구나, 로 결론짓는 날이 많았다. 무력감만 짙어졌다.

그런데 누군가가 말했다. 작가님은 무해한 말을 고르는 사람이라고, 담아님은 매번 나아진다고,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고 잘해보고 싶은지 너무 느껴진다고,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를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되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던지고 간 말을 보고 또 움츠러들었다. 습관처럼 말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리고 한 걸음 물러났다. 정체를 들키면 안 돼,라고 소리치며. 한 뼘 멀어진 곳에서 상대를 바라봤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정직하게 반짝였다. 아니야,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내 쪼잔함을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릴지언정 이해 못 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이 아니잖아. 무슨 말이든 쉽게 뱉고 뒤돌아 지워버리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래서 믿기로 했다. 자꾸 흔들리고 못 미더운 나 대신 상대의 말을. 그들 눈에 비친 꽤 괜찮은 나를. 미더운 사람들이 내게 던진 빛나는 조각을 주워 마구 담았다. 마음이 와르르 무너질 때, 따스한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넣고 입에 굴린다. 쪽쪽 빨아도 결코 빠지지 않은 그 단맛이 마음을 적신다. 조금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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