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속으로, 와이너리 투어

바르셀로나 근교 여행

by 정담아

스페인 여행을 앞둔 내게 친구가 스페인 예찬론을 꺼내들었다. 그 이유를 줄줄 풀어냈지만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건 두 단어였다. 타파스와 와인. 그리고 결심했다. 마음껏 먹고 마시며 천국을 즐기자고. 정말 성실히 목표를 수행했다. 매 식사마다 다양한 음식과 함께 와인을 살뜰히 챙겼으며, 거기서 만족할 수 없다며 와인을 향해 바르셀로나 근교 투어를 떠나기로 했다. 내 생의 첫 와이너리 투어는 그렇게 시작했다.


와이너리 도착 전, 투어에 포함된 몬세라토를 먼저 들렀다. 기대 없이 버스 안에서 마주한 커다란 돌산은 장엄했다. 웅장이라는 단어를 이미지로 표현하면 아마 그렇게 출력되지 않을까. 아득히 흩어진 구름에 닿을 만큼 높이 솟은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 빈틈없이 그 순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착지에 내리자 발 끝 아래로 보이는 작은 마을이며, 낮게 흘러가는 구름들이 내게서 현실을 데려갔다.


그곳에는 지리학적인 매력 외에도 다른 관광 포인트가 있었다. 바로 몬세라트 수도원의 검은 마리아였다. 오래되어 검게 변한 목재의 유약이 신성하게 여겨져 많은 신자들의 발길을 이끈다고 했다. 자연의 신비와 종교적 신성이 포개지는 그곳엔 사람들의 소망이 적힌 쪽지들이 가득했다. 자연이 만든 수많은 틈을 빽빽하게 채운 인간의 종이를 보며, 나 역시 간절함을 적었다. 내가 아는 모두와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가 안녕하길. 그저 우리의 새해가 평온하길. 오늘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듯 나는, 조금 더 욕심내어 올 한 해의 양식을 빌며 진짜 우리의 행선지, 와이너리로 향했다.


와이너리는 원래 중세에 만들어진 성(castle)이었다고 했다. 우리가 방문한 곳 역시 옛날에 만들어진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투박한 문을 밀었다. 무거운 출입구가 느리게 움직이자 아주 오래된 세월이 열렸다. 그 공간이 머금고 있는 오랜 시간에 발을 내디뎠다. 어둡고 두터운 그 바닥을, 계단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시간과 숨결이 흩어져있는 것 같았다.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건물만이 풍기는 묵직하고 넉넉한 매력이 꽤 마음에 들었다.


건물의 옥상에서는 포도밭이 보였는데 우리가 마주한 건 텅 빈 황량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겨울의 빈 시간들이 있어야 가득 채울 수 있는 법. 어쩌면 나는 와인이 만들어지기 위한 가장 처음의 시간, 그 중요한 순간을 마주했던 것일지 모른다. 게다가 아주 한가로운 시기에 방문한 덕에 찬찬히 그곳을 둘러볼 수 있는 행운도 얻었다. 포도를 으깨는 기계, 발효통, 숙성 장소 등을 구경했고, 신이 난 친구는 구역마다 인증샷을 찍기에 바빴다.


무엇보다 가장 신나는 순간은 시음이었다. 화이트 와인 한 잔, 같은 시기에 같은 품종으로 빚은 레드 와인 두 잔과 간단한 타파스가 차려져 있었다. 한 레드 와인에서 조금 독특한 맛이 났다. 거칠고도 보드라운 그 향을 가이드는 earthy라고 표현했다. 흙으로 빚은 도자기에서 숙성되는 동안 시간이 덧입힌 흔적이었다. 같은 와인이라도 어느 그릇에 담아 두느냐에 따라 맛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도 놀라웠다. 사람이든, 음식이든 작은 요소에 따라 그 결과치가 달라지는 것이, 그래서 이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음식과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불쑥 고마웠다. 참 복잡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기게라도 이해하려 섬세하게 살피는 그 과정이, 그 시간 속에서 느끼는 수많은 감정의 결들이 생을 풍성하게 하니까.


간단한 샤퀴테리와 바케트, 올리브, 샐러드로 구성된 타바스도 와인을 마시는 재미를 끌어올렸다. 화려한 꾸밈없이 가장 기본적인 재료와 시간, 소금으로만 완성된 단출한 음식이 만들어내는 담백함이 오묘하고 깊은 와인의 향과 조화로웠다. 오랜 시간이 쌓인 공간에서 오랜 시간이 배인 음식을 음미하며, 그렇게 나의 시간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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