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책방 투어

인생은 알 수가 없어

by 정담아


마드리드는 애초에 계획에 없었다. 내게 수도란 크고 복잡하면서 딱히 특색이 없는 무매력의 대도시였으니까. 하지만 친구는 그곳에 꼭 가야 한다고 했다. 그의 ‘반드시’에 어쩔 수 없이 마드리드를 마지막 행선지로 받아들였지만, 마드리드로 향하는 열차에서 내가 검색한 건 그 도시가 아니라 그 주변 도시였다.


영 내키지 않는 도시에 도착하니 캐리어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겨우 숙소에 도착했다. 스페인에서 묵은 숙소 중 가장 비싸지만 가장 쾌적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여러 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짐을 풀고 거리를 배회했다. 내가 평생을 살아온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커다란 건물들,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빽빽한 상점들, 그 안에서 소비를 유혹하는 수많은 상품들, 그 사이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역시 대도시는 나랑 안 맞아. 오지 말았어야 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왕 이왕 왔으니 둘러보았다. 기분을 끌어올리기에 가장 손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을 위해 유명하다는 식당에 갔다. 비싸기만 했을 뿐 맛은 그냥 그랬다. 마음만 더 상했다. 여기저기 다녀보아도 도대체 마음을 붙일 구석이 없었다. 그곳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매력적인 공간은 글자보다 직관으로 먼저 다가오는 법. 간판을 인지하지 못하는 먼 거리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너로구나!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던 발걸음이 빨라졌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실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책방이었다. 기대하지 않은 발견은 늘 배의 기쁨으로 다가오기에, 복잡하고 황량한 대도시 골목에서 만난 책방은 더욱 반가웠다.


문을 여는 순간, 다른 세계로의 길이 열렸다. 아담하고 웅장했다. 평화롭고 성실했다. 자유롭고 반듯했다. 한눈에 반했다. 아기자기하고도 알차게 전시된 책들. 스페인어를 하나도 몰랐지만 책을 펼쳐 들었다. 영어로 쓰인 책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신비로운 순간이었다. <어린 왕자>, <1984>, <동물농장> 등 평소 좋아하던 책의 새로운 모습을 보니 당장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욕망의 소용돌이가 탕진의 블랙홀로 나를 밀어 넣기 직전, 정신을 차렸다. 워워. 침착하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내일도 있으니까. 간신히 이성의 끝을 붙잡고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마드리드 책방 투어를 하기로.


구글에 주변 책방을 검색한 뒤 몇 군데 저장해두었다. 친구와 함께 식당이나 카페를 갈 때나 보이는 책방을 체크해 두기도 하고, 그저 헤매다 눈에 들어온 곳에 무작정 들어가기도 했다. 곳곳에 수많은 보석들이 숨어있었지만 똑같은 공간은 하나도 없었다. 저마다의 다양한 색깔을 가진 책방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재미있는 책이 많았다. 발상이나 주제 자체가 독특한 책들, 그림이나 색감이 예쁜 책들, 익숙한 책의 특별 에디션까지. 마드리드에서 머문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이곳저곳의 책방으로 채워갔다.


마지막 날, 서울로 들고 갈 책을 고르느라 이 책 저 책 구경했다. 마음 같아서는 잔뜩 들고 가고 싶었지만 책을 살 돈도, 넣을 공간도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야 했다. 아쉬움이 묻은 손길 탓이었는지 구경을 하다 책 한 권을 떨어뜨렸다. 하필 옆에 있던 계단으로 굴러갔다. 너무 놀라 따라 뛰어 내려가 얼른 주워 책을 살폈다. 다행히 상한 곳은 없었다. 민망함과 함께 먼지를 털어낸 뒤 재빨리 자리에 꽂아 넣었다. 다가온 주인을 향해 어쩔 줄 몰라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하다고. 그랬더니 주인이 말했다.


“괜찮아! 이런 게 인생 아니겠어?”

순식간에 잔뜩 웅크렸던 몸과 마음이 활짝 펴졌다. 그의 얼굴을 따라 나도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쿨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 그래. 이런 게 인생이지.'

그랬다. 잊고 있었다. 인생이라는 게 이런 거였다는 걸.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쥔 걸 놓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는 걸. 그렇게 수많은 실수를 반복하고 다시 바로 잡는 게, 그러면서 또 누군가를 만나고 위로받는 게 인생이라는 걸, 그러니 좀 틀려도 괜찮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잊고 살아간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대도시의 번잡함에 실망하며, 역시나 마드리드는 별로라고 내린 나의 결론이 섣부른 편견이었음. 골목 사이사이를 걸을 때마다 ‘잘 봐. 제대로 보라고. 이건 몰랐지?’라며 모습을 드러냈던 책방들을 보며 다시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은 수많은 편견과 오해, 실수의 실타래, 무수한 반전, 그 안에서 오고 가는 감정의 뒤엉킴으로 짜인 드라마임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해했던 마드리드,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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