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뻘짓
“제발 죽도록 한 우물만 좀 파라!”
“그러다 진짜 죽으면 어떡해?”
“지금 이게 그 소리야?!!”
꽤 자주 일어나는 이 대화는 결국 분노 폭발로 끝이 나고야 만다. 엄마는 번듯한 대학을 졸업한 뒤 정규직이 보장된 수험생활을 때려 치고서 쓸데없는 것들에 기웃거리는 나를 몹시 못마땅해했다. 허튼짓 좀 그만하고 제발 진득하게 하나에 집중하라고 했다. 그래야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을 얻을 수 있고, 안락한 집과 지위에 안착할 수 있다고. 나는 말했다. 이미 세상은 변했다고. 더 이상 어디에도 안정적인 건 없으며, 안정적인 직장 또한 없다고. 그러니 그저 변화에 몸을 맡기고 불안정을 즐길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결국 대화는 ‘아우 됐어! 그래, 너 잘났다!’로 끝이 나고 만다.
나 역시 엄마와 비슷한 생각으로 20년 넘게 살아왔다. 대학입시를 바라봤던 12년 동안 수많은 욕망을 유예했고, 그것들은 대학 입학과 함께 폭발했다. 대학 졸업 후 수험 생활이 시작되면서, 10대의 학창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또다시 수많은 욕망들을 다시 꾹꾹 눌러야 했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스스로에게 말했다. 시험이 끝나면, 직장을 얻으면, 고정 수입이 생기면. 그렇게 몇 년 동안 ‘합격하면’이라는 네 글자를 주문 삼아 수험 생활을 버텼고, 시험 한 달 전, 단 한 명도 뽑지 않겠다는 공고를 보고 미련 없이 인내의 시간을 끝내버렸다.
고시원으로 향하는 지하철 플랫폼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내게 남은 건 절망과 좌절뿐이었다. 단단하게 뭉친 그 막막함은 아무리 부수려 해도 쪼개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둠을 깨는 대신 희망을 모아보기로 했다. 며칠을 방안에 혼자 웅크리고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뒹구는 자존감 부스러기가 보이면 무조건 손을 뻗었다. 겨우 한 줌 조차 되지 않은 그것을 열심히 긁어모았다. 날아가 버릴까 무서워 빠져나가지 않게 손에 꼭 쥐고 일어났다. 행여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까 봐 두 손을 포개 쥐었다. 뭐든 해보기로 했다. 해야 하는 것 말고, 하고 싶은 것을.
제일 먼저 시도한 건 한국화였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어릴 적 붓으로 슥슥 난을 치던 이에게서 보았던 무심함과 여유가 부러웠는지도 모르고, 알록달록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빠져나와 흑백으로만 구성된 단순한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그 순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해보고 싶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행동이 조금은 느린 어른들 사이에서 무작정 수업을 들었다.
미술에 소질을 보였던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기에 실력이 매우 떨어졌지만, 형편없음이 허락되는 그 시간이 좋았다. 실수할까봐 전전긍긍하고, 0.1점 차이로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가시밭길이 아니라서 좋았다. 삐뚤빼뚤 흔들리는 선도 옆에 다른 선을 덧대어 그 못남을 슬쩍 감출 수 있는 너그러움이, 눈물 날만큼 좋았다. 쿰쿰하고 시큼한 냄새가 풍기는 수험생이 아니라 푸르른 상큼함이 묻어나는 학생이나 젊은이로 불리는 것도 좋았다. 결국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한국화 수업은 한 두 달 만에 그만두었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고삐가 풀린 것처럼 그동안 미뤄두었던 것들 하나씩 하기 시작했다. 검도, 저널리스트 수업, 기타, 상담, 여행 작가 수업, 사진, 아름다운 가게 봉사, 해외 봉사, 해외여행, 어학연수, 게스트 하우스 스텝, 요가, 필라테스, 시나리오 수업, 수영, 승마, 독립출판 까지. 그때마다 엄마는 제발 좀 그만하라고 했고, 나는 아직 못해본 게 너무 많다고 했다. 세상엔 내가 알지 못하는 즐거움이 너무 많고, 나는 그걸 알고 싶으니까. 해보고 싶으니까. 왜냐고 묻는다면 ‘그냥’.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인다면, 그 수많은 뻘짓들이 날 행복하게 하니까.
새로운 뻘짓을 시작하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요가를 시작하고 나는 내 몸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자꾸 피곤하고 게을러지는 스스로에게 ‘정신력이 약해빠졌다’며 다그칠 뿐 몸이 보내는 신호를 외면했던 지난날의 나를 반성했다. 안 쓰던 근육들을 음직이며 새로운 자극을 알아가는 재미가 생겼다. 매 순간 무의식적으로 하던 호흡이 내 안에 퍼지는 느낌과 나를 넘나드는 감각의 신선함이 놀라웠다. 새로운 세계에서 만나는 인연 또한 내 삶을 풍성하게 했다. 많은 친구가 생긴 건 아니지만 스쳐지나든 오래 머물든 내 인생에 크고 작은 파장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만났다. 그들을 통해 마주하는 또 다른 무한한 세계가 좋았다.
내가 찔러대는 수많은 우물은 너무도 얕다. 하지만 그 작은 우물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땅을 찾고 두드리고, 견고한 대지에 틈을 내기 위해 들이는 품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어쩌면 커다란 하나의 우물을 파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품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만큼 다채롭게 펼쳐지는 장면들을, 작은 웅덩이들이 맞닿아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는 순간을, 그 오묘한 경이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기웃거린다. 새로운 뻘짓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