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의 맛

바르셀로나의 열쇠, 그리고 여유

by 정담아

“내가 할까?”

“아니, 내가 할래.”

쓸데없이 자존심이 상했다. 친구 말고 문한테. 이게 뭐라고 한 번에 안 되는 거야? 내 돈 내고 내가 구한 숙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매번 이런 씨름을 통과해야 하는 게 빈정상했다. 모든 건 열쇠 때문이었다. 열쇠를 들고 다니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마당에 열쇠와 씨름할 줄이야. 게다가 이 녀석은 한 번에 쏙 들어가 약간의 스냅에도 경쾌하게 반응하며 짠- 하고 열렸던 기억 속 그것과 사뭇 달랐다.


생김새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영상 자료에서만 구경했던 모양이랄까. 무게감도 남달랐다. 그 무게만큼 마음의 무게도 늘어났다. 혹시 잃어버릴까 몇 번씩 가방을 확인해야 했으니까. 그런 불편함은 차라리 나았다. 녹초가 된 상태에서 문 하나를 두고 방에 들어가지 못한 채 열쇠와 씨름하는 고통보다는. 화장실이라도 급한 경우라면 마음은 더더욱 급해졌고, 그럴수록 손은 더더욱 더뎌졌다. 핵심은 돌려야 하는 각도와 방향이었다. 문제는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손놀림과 많이 다르다는 사실. 그럴 때마다 ‘한국 사람들은 어른이 왜 문을 못 여냐’며 현지인들이 의아해한다는 가이드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다.

“우리는 이제 열쇠 안 쓴다고!”


때 아닌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소환된 것도 순전히 그놈의 열쇠 때문이었다. 처음 집 현관문 열쇠를 받았을 때의 감격이 문득 떠올랐다. 이제 어른이 된 것만 같았던,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은 것만 같던 순간이었다. 내가 사는 공간의 열쇠 하나가 주어진다는 건 누구의 도움 없이 그 공간에 진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열쇠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을 감내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는 그 책임은 어린 두 어깨를 쫙 펼쳐주었다. 내가 사는 공간의 당당한 일원이 된 것만 같았다.


학교를 갈 때도, 학원을 갈 때도, 친구를 만나러 나갈 때도 늘 열쇠를 챙겼다. 행여 열쇠를 집에 두고 온 날이면 친구를 불러내서 떡볶이를 먹고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때웠고, 그마저 여의치 않은 날에는 집 근처 단골 책 대여점에서 쭈그리고 앉아 책을 뒤적였다. 남다른 덜렁댐 덕에 열쇠가 없어 배회한 시간을 주워 담으면 제법 무게가 나갈 것이다. 그만큼 추억의 무게도 늘었다. 그리고 그 무게감을 덜어낸 지금, 머릿속 숫자를 손끝으로 출력만 하면 언제든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서 쓸데없이 배회할 필요가 사라졌지만, 어쩐지 여유도 조금 줄어든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서는 조금 달랐다. 아니, 달라지기로 했다. 빠르고 촘촘하게 살아냈던 도시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만난 바르셀로나의 해변은 조금 낯설었다. 내게 바닷가는 관광객들의 몫이었지 일상의 풍경은 아니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장기 비슷한 놀이를 하는 백발의 노인들, 젊음을 불태우며 운동을 하는 청년들, 바다를 향해 쪼르르 만들어진 돌 벤치에 누운 가족들. 모래사장 위 개마저 한가로운 그곳에서 나도 그들을 따라 돌 벤치 하나를 차지했다. 나른하게 누워 온몸으로 햇볕을 받으며 책을 펼쳐 들었다 덮기를 반복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 건물 밖에 서 여유를 부린 게, 목적의식 없이 그저 유희만을 위한 독서를 한 게 대체 언제였는지. 마음껏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어떤 행위도 없었지만 그 자체로 꽉 차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행복했던 순간은 해가 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저 정처 없이 골목과 골목 사이를 누비고, 우연히 만난 상점을 기웃거렸다. 그때였다. 음악 소리가 들린 건. 애절하지만 처연하지는 않은 노랫소리를 따라갔다. 반주가 흘러나오는 스피커 옆에 서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여리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좁은 골목 담장에 부딪치며 밤공기 사이로 부서졌다. 아름다운 노래가 사라질 때쯤 다른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기타 선율 위에 얹어진 노랫소리였다. 그 앞에 펼쳐진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울려 퍼지는 음악을 배경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로 향하는 높은 첨탑들 사이를 가득 메우는 까만 어둠, 그 위에 흩뿌려진 별빛과 어른거리는 달무리, 비행기가 남긴 하얀 흔적들까지. 신비로운 영화 한 편이 막 시작될 것만 같았다. 목적을 잃고 배회한 발걸음이 건넨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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